<*body oncontextmenu="return false" onselectstart="return false" ondragstart="return false">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로그인이 안될 때는 ☞수필넷다음카페별관 수필의 뜰에 올려주시면 적절히 게시물이동을 하겠습니다.
2009. 7. 23, 저작권 강화로 인해, 작가가 직접 등록하거나 등록을 부탇받은 글만 게시합니다. 감사합니다. (☞메인)-


  sysop(2014-06-29 07:16:57, Hit : 1459, Vote : 112
 도월화의 수필 세계 / 鄭木日수필가 서평


달과 꽃이 있는 서정 수필의 향기

-도월화의 수필 세계

鄭 木 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한국문협 부이사장)

1. 달과 꽃의 세계

도월화수필가가 <여월여화(如月如花)>(2007년. 선우미디어)에 이어 두 번째 수필집을 내놓는다. 처녀 수필집이 나온 지 7년만의 일이다. <여월여화(如月如花)>에 작가의 머리말을 보면 먼저 자신의 이름에 대한 연유를 들려주고 있다.

달 같고 꽃 같으라고, 여월여화(如月如花)에서 따온 이름을 지어주신 나의 할아버지 영전에 이 책을 바치고자 한다.

사과꽃 피는 사월이면, 할아버지 생전에 지으시던 과수원에 다시 가보고 싶어진다. 그곳에 못가 본 지 삼십 년이 넘는다. 그리 먼 곳도 아니건만 늘 회상만 하다가 봄이 간다.

봄바람에 사과 꽃잎이 보드라운 나래를 파닥인다. 사과나무 가득히 흰나비 떼가 날아 앉았는가. 햇살은 미뉴에트를 연주하고, 무수한 하얀 나비들이 작은 떨림으로 4분의3 박자의 우아한 춤을 춘다. 사과 꽃으로 하얗게 덮힌 아름다운 공간에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면, 더욱 숨막히게 황홀한 풍경이 달빛에 출렁이는 사과밭.

할아버지가 과수원을 하셨기에 나의 이름 속의 꽃은 틀림없이 사과꽃일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은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이다. 아마도 할아버지의 손녀 사랑이 달빛 내리는 사과꽃밭 같아, 이처럼 이름 지어주실 수 있으셨던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할아버지 세상 버리신 지 몇십 년 지난 후에야 해보게 되었다.

달처럼 꽃처럼 살지는 못해도, 종종 일상 속에서 눈을 돌려 열심히 바라보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쉽지 않을 뿐이다.

― 도월화, <여월여화(如月如花)> <책머리에> 중에서

달과 꽃으로 이름을 지었다는 건 그냥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도월화씨는 숙명적으로 달빛과 꽃의 세계를 지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도월화씨의 수필에선 달빛의 맑은 도취와 꽃향기가 있다. 자극적이지 않고, 언제나 은은하고 투명한 그리움을 안겨주는 글들이다. 달빛의 세계, 꽃의 세계를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적이며 영원한 세계여서 닿을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 도월화씨를 생각하면, 수필에선 달빛이 보이고 꽃향기가 나는 것을 느낀다.

뒤뜰에 숨어 몰래 핀 작은 풀꽃에도 달이 스며든다. 프랑스의 작곡가 드뷔시의 피아노곡, '달빛(Claire de lune)'을 들으면 달빛은 느릿느릿 기어간다. 제 그림자를 밟으며 고요한 걸음으로 달이 가고 있다. 달빛은 있는 듯 없는 듯 여리고 부드럽게 천천히 움직인다.

달은 내가 어디에 가든지 언제나 그 자리이다. 하지만 은연중에 차오르고 이지러짐을 반복하고 있다. 변화를 좋아하지 않고 한결같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달처럼 꽃처럼 살지는 못해도, 밤에는 달 낮에는 풀꽃을 보며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로 가득 찬 나날을 맞았으면 한다. 과수원을 하신 할아버지께서 '여월여화(如月如花)'에서 따온 내 이름을 지어주실 때는 달빛내린 사과꽃밭을 연상하셨을지 모르나, 그저 눈에 띄지 않는 들꽃을 닮아갈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있겠는가.

< 달처럼 꽃처럼> 일부

수필가 도월화는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달과 꽃’을 생각하며 자신의 인생이 달과 꽃의 세계로 살아가길 바라고 있다. 2000년 계간 <창작수필>을 통해 데뷔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꿔온 수필 영역은 달과 꽃이 있는 서정의 세계이다. ‘월하미인(月下美人)’이란 말이 있다. 똑 같은 미인일 지라도 달빛 속에 보는 미인은 더 고혹적이고 아름답다는 말이다. 햇빛 속의

모습은 너무 환한 까닭으로 한 가지의 모습이 부각되지 않지만, 달빛의 시· 공간에선 그리움과 은은한 정서가 펼쳐진다. 한국의 정서는 한낮의 햇살 속에 모든 게 드러나는 세계가 아니다. 달빛 속에서 은근하고 그리움이 샘솟는 세계일 것이다. 눈에 번쩍거리게 화려하거나 황홀한 것을 탐하지 않고, 달빛 속처럼 마음으로 닿아 환해지는 정서를 바란다. 모든 게 다 드러나는 게 아니고, 마음의 눈맞춤이 있고 오래도록 바라보아야 한다.

달빛 속의 꽃이라면 어떤 세계일까. 달은 우주 공간에 있고, 꽃은 땅에 있다. 하늘과 땅이 마주 보고 있으며, 달빛 속에 꽃이 있다. 달과 꽃의 만남은 가장 아름다운 하늘과 땅의 만남이다. 달밤에 연인을 만나면, 한 마디 말조차 하지 않더라도 두 사람의 마음은 달빛으로 인해 서로 닿아있음을 느낄 것이다. 달빛은 두 사람을 도취 속에 끌어들일 수도 있다. 달빛은 직유법이 아닌, 무한한 빛의 은유법을 구사한다.


매년 여름, 연꽃을 보러 가고 싶었다. 동양 최대라는 무안 연꽃 축제에 가보려고 벼르기만 하다가, 금세 꽃은 져버리고 때를 놓쳐왔다. 그저 일상 속에서 세월만 흘려보내다가 사라지는 것이 삶이런가. 오늘은 연꽃 보러 가는 날. 먼 곳까지 가야하는 큰 연꽃 단지는 아니더라도, 가족끼리 가까운 운악산 봉선사 연꽃을 찾게 된 것만도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가.

사찰로 들어가는 길가에 푸성귀들이 자라나고, 좁다란 도랑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검정색 날개가 흑기사마냥 귀족풍의 빛을 뿜는 물잠자리가 앞장서서 날며 연지로 향한다. 드문드문 붉은 고추가 열린 고추밭, 초록색 콩밭이 줄을 잇고, 그 옆 깨밭에는 자그마한 참깨 꽃들이 연보랏빛 초롱처럼 올망졸망 매달려 연꽃 보러 가는 길목을 밝힌다.

저만치서 하얀 얼굴의 차분한 여인이 나를 반기는 듯 목을 빼고 손짓하고 있다. 바로 오늘 내가 만나러 온 반가운 이가 아닌가. 백옥같이 흰 피부의 미인이 온몸에 녹색 비단 너울을 휘감고 있는가. 연이어 눈에 들어오는 백련 송이들이 연못 여기 저기 피어나 있다. 꽃송이가 크고 소담스러워 과연 심청이가 타고 다시 환생 할만하다. 육지 꽃의 여왕은 장미나 모란일까, 혹은 다른 꽃일까. 연꽃의 아름다움은 수중에서 핀 꽃의 여왕이라 할 만큼 빼어나다. 아직 봉오리 진 연꽃, 활짝 핀 연꽃, 더러는 연밥이 맺힌 것도 눈에 뜨인다.

<연꽃 만나러 가는 길> 일부

<연꽃 만나러 가는 길>은 <연꽃 피는 소리>와 함께 연꽃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선비들은 ‘사군자(四君子)’라 하여 매(梅), 난(蘭), 국(菊), 죽(竹)을 선호하며, 평생 동안 수행과 삶의 지표로 삼아 왔다. 연꽃은 불가(佛家)에서 ‘깨달음의 꽃’으로 사찰건물이나 기와집엔 의례 연화문(蓮花紋) 기왓장을 사용하였다. 도월화 수필가는 자신의 이름에 피어있는 달빛과 꽃의 세계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연꽃 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며, 연꽃 만나러 가는 길조차 예사롭게 여기지 않는다.

2. 문화체험과 사색

도월화의 수필 소재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탐구이다. 문학, 미술, 음악, 민속 등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준다.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의식과 특질을 알고 고유미학을 발견해내고 싶어 한다. 그의 관심은 음악과 미술 장르에 더욱 깊어져 음악회나 전시회장을 찾게 되고, 인생과 삶에 결부시켜 생활미학을 섬세한 필치로 담아냄을 본다. 문화체험을 통해 삶의 미의식과 인생에 대한 발견과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나는 지금 고흐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쳐다보며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3.30~1890.7.29 네덜란드)가 백 여 년 전에 그린 그림에서 화가의 숨결이 묻어난다. 그는 오늘날도 고흐 애호가들의 가슴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강가의 산책로 저편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다. 모자 위에 촛불을 올려놓고 론 강가에서 그림을 그리는 고흐의 모습이 떠오른다.

고흐는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제목으로 두 점의 유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생레미 시기에 병이 호전됐을 때 그린 것이 현재 뉴욕 현대 미술관에 있는 '별이 빛나는 밤'이다. 그 이전 아를 시기에 그린 것이 오늘 내가 보고 있는 예술의 전당 [오르세미술관 전]에서 이번에 국내 최초로 전시되는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고도 불린다.

(중략)

나는 왜 고흐의 그림 앞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가. 불우했던 천재 화가에의 연민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화폭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흔히 비평가들은 불안정한 자신을 표현했다고 하지만, 나는 고흐 역시 그릴 때만은 행복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왜냐하면 오늘 전시장에 온 많은 이들이 눈가가 젖어드는 감명을 받기 때문이다. 감상자마다 소감이 다르겠지만 나는 고향의 여름밤이 떠오른다. 어릴 적 시골의 별이 쏟아지는 정경이 펼쳐져 있다.

우주의 기운과 인간의 기(氣)가 일치할 때 평화가 깃든다고 한다. 고흐의 이 그림에는 자연과 화가와 관람객이 시공간을 초월해 일체로 어우러지는 벅찬 교감이 있다. 종래에는 서서히 무지개를 볼 때처럼 감동이 벅차오른다고나 할까. 천체의 흐름, 물결치는 강물이 보인다. 공간예술인 미술에 시간과 공간을 다 담아 놓았다. 뉴욕현대미술관의 ‘별이 빛나는 밤’이 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통찰과 상상력이 녹아있는 것 같다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오르세미술관 전]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은 그대로 내 고향의 밤하늘이라서 정감은 더한 느낌이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일부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의 명작이다. ‘예술의 전당’에서 특별기획전으로 개최한 <오르세미술관전>에 나온 고흐의 작품을 보고 쓴 수필이다. 도월화수필가는 천재들의 작품에서 깊은 사색과 영성을 공감하며 예술세계에 빠져든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고 그는 수필가로서의 감상법을 펼쳐낸다.

‘나는 왜 고흐의 그림 앞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가. 불우했던 천재 화가에의 연민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화폭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고흐의 이 그림에는 화가와 관람객이 시공간을 초월해 일체로 어우러지는 벅찬 교감이 있다.’

‘그대로 내 고향의 밤하늘이라서 정감이 더한 느낌이다.‘

작가는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서 어릴 적 고향의 밤하늘을 떠올리며 시공간을 초월해 일체로 어우러지는 벅찬 교감을 느낀다.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우주의 무한 신비를 느끼면서 무언지 모를 행복감에 잠긴다. 이러한 교감은 예술을 통한 찰나의 아름다움에 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도월화의 수필세계 속엔 문화현장과 예술작품을 통해 작가와 감상자의 교감, 인생의 발견과 깨달음의 꽃을 발견하고자 하는 의식이 드러난다.

수필은 안개 빛이다. 흔히 한 치 앞을 못 보는 것이 인생이라고도 한다. 짙은 안개가 내려 볼 수 없다고 해서, 물론 아무 것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밀란 쿤데라가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세계라는 덫 속에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사다.” 라고 했듯이, 안개에 쌓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사하는 것이 수필이 아닌가 한다. 주변이나 역사의 인물, 우주 자연, 사후의 신비 등에 관한 탐사, 무엇보다도 나는 누구인지, 나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나의 정체성을 탐사하는 것이 수필이라고 생각된다.

수필은 미지의 세계로 향하여 난 순례자의 길이자, 구도의 길이다. 헤르만 헤세, '동방순례'의 주인공인 HH는 아름다운 파트마 공주를 찾아, 동방여행을 떠난다. 파트마 공주란 천일야화에도 나오는, 예언자 마호멧의 딸이라고 되어있으나, 여기서는 도(道)를 뜻한다고도 한다.

수필은 오래 묵은 향기이다. 도(道)라는 것은 실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닌가. 인간에게 있어서 관념의 세계가 중요하다면, 정신을 담는 육체도 소중하다. 우리 신체를 유지해주는 것은 공기와 음식이고, 매일의 식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오래 동안 저장해도 독특한 풍미를 잃지 않는 김치나 젓갈 같은 발효 식품과 된장국이 아니겠는가. 작가의 일상이 그대로 묻어나면서도 오래도록 질리지 않는 그 향내는 곰삭아 제 맛이 나는 수필의 향기라는 생각을 해본다. 드물게 원로들의 글이나 빼어난 서정 수필을 읽으면 매화 향기가 나지만, 내게는 너무나 먼 경지일 뿐이 아니던가.

(중략)

수필은 노천카페 옆에 서있는 플라타너스 나무이다. 그 곳이 한적한 길이라면 더 좋겠지만, 북적거리는 시내 한복판에 있어도 마음의 여유를 찾는 쉼터가 되어준다. 하얀 철제 의자들과 몇 개의 작은 테이블, 오가다 잠시 앉아 쉬는 사람들의 표정, 거기에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안겨주는 휴식이 있고 아련한 그리움이 피어오른다. 바람이 불어오면 잎사귀가 지나가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고, 가끔 올려다 보이는 하늘에는 햇살이 흰 구름 사이로 인상파 그림 같은 화폭을 늘어뜨린다. 잎 넓은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 아래서 마음이 통하는 벗들과 커피나 아이스크림을 함께 나눈다면 앙드레 가뇽의 쇼팽음악이 듣고 싶은 한 때가 되지 않을까.

< 파트마 공주를 찾아서> 일부

<파트마 공주를 찾아서>는 도월화의 수필로 쓴 수필론이다. 오늘날 수필은 문학 장르 중에서 시(詩) 다음으로 많은 작가가 활동하고 있다. 아직도 수필을 아마추어 문학이나, 비전문문학으로 비하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필은 가장 쓰기 쉬운 면이 있으나, 가장 쓰기 어려운 문학이라는 데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본다. 수필은 자신의 삶과 인생을 비춰낸 거울이나 다름없다. 인생의 자화상이 곧 수필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수필경지는 곧 인생경지일 수밖에 없다. 인격에서 향기가 나야 수필에서 향기가 나는 법이다. 정신이 고결하고 아름다워야 수필에도 고결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법이다. 수필이란 기법이나 수식으로 이뤄지는 문학이 아니다. 삶의 발견과 깨달음으로 얻게 되는 문학이다. 무엇보다 마음과 영혼이 깨끗하고 향기로워야 독자들에게도 평온과 미소를 전해줄 수가 있다.

도월화는 ‘수필은 안개 빛이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누구인지, 나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나의 정체성을 탐사하는 것이 수필이라고 생각된다.’고 토로한다. 수필은 인생에 대한 탐사, 나는 누구이며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수필은 체험의 나열이나 기록이 아니다. 자신의 체험에 대한 삶의 발견과 인생의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나의 삶, 나의 인생’에 대한 단순한 토로나 기록이어선 안 된다. 삶과 인생에 대한 통찰, 성찰, 발견, 탐구, 깨달음이어야 하며, 이에 대한 의미 부여가 있어야 한다. 자신만의 푸념과 토로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독자들에게 인생적인 도움과 삶의 지혜와 의미를 제공하여야 한다. ‘나의 정체성을 탐사하는 것이 수필’이라는 견해는 적절한 분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수필은 미지의 세계로 향하여 난 순례자의 길이자, 구도의 길이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르게 태어나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미지의 세계로 가고 있는 순례자이다. 수필쓰기를 통해 마음에 묻은 욕망이란 때를 벗겨내고, 성냄이란 얼룩을 씻어내고, 어리석음이란 먼지를 털어내야 하는 법이다. 마음에 티끌이 없어지고 맑아져야 문장에서 향기가 나고 비로소 미소가 피어날 수 있다.

도월화는 ‘수필은 노천카페 옆에 서있는 플라타너스 나무이다. 그 곳이 한적한 길이라면 더 좋겠지만, 북적거리는 시내 한복판에 있어도 마음의 여유를 찾는 쉼터가 되어준다.’고 했다. 수필문학에 대한 참다운 가치관과 의미를 깨닫고 정예 수필가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가 쓰는 수필의 정신과 의미를 뚜렷이 보여주는 대목이다.

3. 순수 영혼의 빛깔과 향기

도월화의 수필을 읽으면 맑고 향기롭다. 우선 마음이 편안해지고 깨끗해진다. 번잡이 사라지고 한가로운 가운데 미소가 떠 흐른다. 작가의 순수한 영혼을 느끼게 하고 부시지 않는 은은한 달빛으로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관록과 지식으로 아는 체 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 선 겸허한 자세로 나직이 자신의 체험과 사유 깊은 인생론에 대해 귀엣말을 들려준다.

고(故) 이태석 신부(*1)는 일찍이 인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뒤늦게 신학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의사라는 현실적으로 장래가 보장된 직업을 가졌으나 어려운 사제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저 눈물만 흘리는 어머니께 그는 효도를 못해서 죄송하지만 하느님께 자꾸 끌리는 걸 어떡하느냐며 함께 울었다고 한다.

우리 작은애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안드레아는 커서 신부님이 되거라."라고 수녀님이 말씀하셨다. 성당에서 복사 서고 옷을 갈아입는 제의실에서 들었던 이야기이다. 하기야 두 아들 모두 어릴 적 신부님께서 미사 집전하실 때 옆에 서서 하얀 옷 입고 도와드리는 복사 섰으니, 그 이전에 큰아이도 들었던 권면이다. 그 때 형의 반응은 신부님 아무나 되는 거 아니니 권하지 말란다. 반면에 동생은 진지하게 나에게 의논해왔다. 나는 기도 중에 예수님께 여쭤보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기도 중에 물어본 후에 저한테 전해주시면 그대로 할께요."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네가 직접 기도해서 정해.” 라고 말했다. 자신을 비우지 못하고 나로 가득 차서 하느님의 이끌림에 무딘 이 엄마가 한 대답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었고, 그 논의는 그렇게 잊혀져갔다.

얼마 전 본당신부님께서 주일미사 강론 중에 성직자가 되고 싶은 청소년들 손들어 보라고 하시자 온 성전이 잠잠했다. 신부님께서는 사제가 부족해질 앞날을 염려하셨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울지마, 톤즈'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를 감격시킨 고 이태석 신부님 같은 분이 나타났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 아닌가. 대체 그분의 내면세계에 남다르게 내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무척 궁금했다. 마침 타계하기 바로 전에 남긴 유일한 저서가 있어서 읽어보았다. 이 신부님이 쓰신 수필집의 제목은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2010년 생활성서사 출간)이다.

그는 한 송이 국화였다.

봄이면 철따라 다투어 꽃이 피지만 다 지고 마는 가을에 피어나는 국화꽃처럼 메마른 이 시대를 감동으로 적셨다. 이태석 신부님은 의사 사제로서 뿐만이 아니라, 건축가 교육자 음악가로서 아프리카에 혼신을 다 바쳤다. 섭씨 40도에 육박한다면 가만히 숨만 쉬고 있기도 어려운 기온이다. 그 불볕더위에 톤즈 거주민과 함께 톤즈 강의 모래를 실어다 손수 벽돌을 찍어 병원을 짓고 학교를 지었다. 스스로 설계 도면부터 그렸다. 의료품 보관 할 냉장 설비를 위해 지붕에 태양열 발전시설도 직접 설치했다. '울지마, 톤즈' 제작자(KBS 구수환 PD)는 수단에 가서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도 근래에 이 책만큼 읽으면서 많이 울어본 도서가 없었다. 수없이 세면대에 들락거리며 울다 지쳐 나중에는 그만 읽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깊은 감명의 자기장 속으로 침잠해 한동안 눈물을 흘린 채로 눈을 감고 미동도 않았다.

그는 한 송이 난초꽃이었다.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읽어갈수록 서늘한 난향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단전호흡 할 때처럼 상쾌한 바람이 코끝에서 배속까지 통했다. 덧없는 현세에 목매고 사는 내 모습이 보인다고나 할까. 보다 큰 기쁨, 감사, 찬미의 노래가 흐르는 세상의 청사진을 이태석 신부님의 난초 향기 고고한 마음속을 통해 보여주는 듯 했다. 바로 그곳에 천국의 열쇠가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님은 2001년 사제서품을 받고 자청해서 수단으로 갔다. 남 수단은 내전 중이고 아주 위험한 곳이라 누구든지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가 정착한 톤즈 마을은 오랜 내란 중에 다치거나 아파도 치료를 못 받고 죽어가고, 오염된 강물을 마시는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이 신부는 의사로서 낮이고 밤이고 짜증 한번 내지 않고 기꺼이 병자들이 찾아오면 치료해 주었다.(1일 진료 300명 이상) 붕대로 싸매 준 맨발의 나환자들이 계속 다치자 몸소 그들의 변형된 발에 대고 본떠 꼭 맞는 신을 제작의뢰하기도 했다. 나환자들은 고난 속에서도 보통 사람보다 더 민감하게 감사할 줄 안다고 한다. 그는 책에서 나환자들의 신비스러운 능력에 대해 오히려 감사한다고 썼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 한 채 이곳 수단까지 오게 한 것도, 열악한 환경이지만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모두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 주위로 모이게 하고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드는 보잘것없는 나환자들의 신비스러운 힘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

이러한 나환자들의 특별한 능력을 보면서, 식물인간, 뇌성마비, 뇌졸중, 자폐증 등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환자 가족들과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가끔 묵상을 하게 된다. 환자들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아픔을 가슴에 품고 평생 그들을 보살펴야 하는 가족들의 고통은 당해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멍에나 십자가가 이 세상에 또 있으랴.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이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힘은 때로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족을 하나 되게 하고 가족들에게 참된 신앙을 갖게 하며 가족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깊게 체험하게 하는 그들의 힘은 신비스럽기 이를 데 없다.

물론 시간도 많이 걸리고 엄청나게 큰 고통의 문을 통과해야겠지만, 우리에게 뜻밖의 큰 은총의 선물을 주는 그들에게 우리가 오히려 감사해야 하고 그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하느님께도 감사드려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이태석 저,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중의 [천국의 열쇠]에서-

<울지마, 톤즈> 일부

<울지마, 톤즈>는 저자가 ‘수단의 슈바이처’라고 하는 고(故) 이태석 신부의 유일한 저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읽고 쓴 독후감이다.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읽으면서 이태석 신부의 거룩한 영혼과의 만남과 그의 성취와 초인적인 삶을 보면서 흐르는 감동의 눈물과 영성을 느끼게 한다. <울지마, 톤즈>는 독후감만이 아닌, 성당에 다니는 작은 아들에게 수녀님이 신부가 되라고 권면한 말을 듣고 어머니인 저자와 나눈 대화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 때 형의 반응은 신부님 아무나 되는 거 아니니 권하지 말란다. 반면에 동생은 진지하게 나에게 의논해왔다. 나는 기도 중에 예수님께 여쭤보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기도 중에 물어본 후에 저한테 전해주시면 그대로 할께요."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네가 직접 기도해서 정해.” 라고 말했다. 자신을 비우지 못하고 나로 가득 차서 하느님의 이끌림에 무딘 이 엄마가 한 대답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었고, 그 논의는 그렇게 잊혀져갔다.’

작은 아들이 수녀님이 하신 말씀대로 ‘신부가 될까?’라는 물음에 직접 긍정도 부정도 못하고 “네가 직접 기도해서 정해.”라고 ‘일단 피해 보는 것이었고, 그 논의는 그렇게 잊혀져갔다.’는 솔직한 고백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이나 어머니로서도 결정을 하기는 이른 시기였다. 이태석도 의과대학을 마치고, 신학대학에 들어가서 비로소 진로를 결정하지 않았는가. 고 이태석 신부의 거룩한 영혼과 삶의 실천과 의미를 독후감 형식의 수필로서 잘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고인의 숨결과 체취가 그대로 전해오듯 생동감 있게 그려진 수필이다.

4, 삶의 발견과 깨달음

도월화의 수필은 체험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체험을 통한 삶의 발견과 성찰, 깨달음, 미학이 있다. 사소하고 평범함 속에 이뤄졌던 일이나 사건, 혹은 체험들에서 비범함, 특별함을 찾아낼 줄 아는 안목을 가졌다. 사물이나 형상을 볼 때, 바깥만을 보지 않고 속을 들여다 볼 줄 안다.

모양을 보고 마음과 영혼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도월화 수필가는 사물의 겉모습을 보면서 먼저 영혼과 중심을 바라볼 줄 안다.

겨우내 얼었던 시냇물이 녹아내린다. 업장 소멸인가. 물안개가 투명한 면사포처럼 아른거린다. 가득 핀 복숭아꽃을 통해서 본 선계가 무릉도원이듯이, 사방이 안개에 쌓이면 신비한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가. 온갖 나쁜 것은 감싸 주고 용서하고 자정(自淨)하는 것일까. 나는 자욱한 물안개가 눈앞을 가리는 날은, 열명길도 저와 같을까, 아무도 모르는 이 세상의 끝도 저처럼 포근하고 고요했으면 싶을 때가 있다.

춘천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봄내이다. 봄이면 강변에 연두 빛 수양버들 나부끼고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곳. 냇가 조약돌 졸고 있는데 보드라운 물비늘 일으키며 내가 흘러 강에 이른다. 저 건너 먼 산 진달래 점점이 붉은 미소 머금고, 산길 양쪽으로 늘어선 개나리는 따사로운 봄이 좋아 연방 생글댄다. 소양댐에 비 내리면 팥죽 끓는 것 같다고 개나리처럼 웃던 이들이 생각난다. 언젠가 서울의 여러 친구들이 춘천 소양호 뱃놀이 중에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자, 아줌마들 표현이라 할 수 없다고 소녀시절처럼 더 이상 쇼팽의 피아노곡이 아닌 팥죽 끓는 소리로 들린다고 우스개를 부렸다. 세월도 강물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사철 강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흐르는 물처럼 살 수 있기를 바랐다. 동트면 물안개 짙게 끼고, 저녁엔 서편의 구름에 걸린 석양이 고운 곳. 작은 다리가 놓여있어 강을 보며 거닐 수 있으면 했다. 여름 날 강변의 논두렁길을 걸어가면 저 멀리 논배미가 녹색 양탄자처럼 부드러워 보인다. 바로 옆 가까이 있는 논은 융단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바람에 날리는 벼 포기 사이로 금방이라도 메뚜기가 뛰어 나올 것 같다. 백로 날아드는 건너 편 풀밭의 노란 고들빼기 꽃들이 초록에 노랑 꽃무늬가 놓인 소녀의 면 블라우스처럼 정겹다. 요즘은 보기 드문 검은 잠자리와 흰 나비가 도랑 위를 날아다니던 어릴 적 고향 풍경을 늘 그려왔는데, 춘천에서 얼마간 살 기회가 온 것이다. 지금은 서울로 돌아 온지도 그럭저럭 2년이나 되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춘천에서 지낼 계기가 마련됐으면 싶다.

<춘천의 추억> 일부

<춘천의 추억>은 한 폭의 화사한 수채화이다. 봄이 오는 시냇가의 정경, 화조도(花鳥圖)를 보는 듯한 서정 수필이다. 얼었던 얼음이 풀리면서 다시 깨어나는 시냇물, 여기저기 풀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풀밭…. 봄은 희망과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안고서 강변으로 논두렁길로 오고 있다. 계절이 일 년마다 한 번 씩 순환한다는 건 은혜로운 일이다. 현대는 점차 자연을 잃어가고 있다. 자연 회복은 곧 생명 회복이다. 우리 삶에 있어서도 자연 정서를 회복시켜야 한다. 도월화의 수필은 자연 정서의 회복을 통한 마음의 평온과 치유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

‘온갖 나쁜 것은 감싸 주고 용서하고 자정(自淨)하는’ 것은 자연이고, 우리는 자연회복을 통해 정서의 회복, 삶의 회복을 꾀할 수 있다.

도월화의 서정 수필은 공해에 물든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는 세정제요, 정화수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서정의 핵심은 정(情)이며 생명을 꽃피우려는 긍정적인 마음이다. 도월화의 수필은 달빛과 꽃이 있는 우주적인 서정세계를 보여준다. 생명의 존엄성과 존재의 의미와 공동체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7년 만에 내는 도월화 수필가의 두 번째 수필집 상재를 축하한다.

 - 달과 꽃이 있는 서정 수필의 향기/ 정목일 수필가 < 달처럼 꽃처럼 >서평-

☞ 도월화 문화사색 에세이 click~^^


☞  2014 한국수필 문학상 - 도월화 수필집 < 달처럼 꽃처럼 > click~^^



     

 






성천강 이야기
칼국수 한 그릇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zero
좋은 작품을 올려주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모든 게시물의 저작권은 해당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글 등록이 안되실 때는, ☞수필넷다음카페별관 수필의 뜰로올려주시면 적절히 게시물이동을 하겠습니다.
"★작가별 수필 검색~ www.supil.net 수필넷 [ 에세이 아카데미아 ]방문 환영~ Thanks for visiting~! Enjoy...Thanks!"cl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