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에세이―이진영] 지우개와 딜리트
지난 20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지우개와 컴퓨터의 딜리트(delete) 키가 아닐까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어린 시절에는 서투른 글씨나 실수를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늘 필통 속에 연필과 함께 들어 있었다. 그러나 지우개로 지워도 종이 위에 희미한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다. 빡빡 힘주어 문질러대도 실수를 깔끔하게 지운다는 게 사실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어리기 때문에 덮어질 수 있는 한 가닥 관용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만년필,볼펜 등,편리한 필기도구들을 선호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들을 지울 수 있는 편리한 도구는 흔하지 않았다. 자신의 흔적을 책임져야할 만큼 성숙해져서일까.
이제 나는 필기도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컴퓨터 자판에 익숙해져서이다. 컴퓨터의 반듯한 글씨는 나의 서투른 필기를 시각적으로나 속도라는 면에서 능가했다. 그리고 딜리트 키의 편리함은 한 번의 손놀림으로 실수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쉽고 빠르게 어제를 지우고 다시 오늘을 만들어 가는 현대인처럼 난 그 편리함에 만족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어제 난 그 딜리트 키를 누름과 동시에 지난 3년간 나의 홈사이트에 남겨주신 모든 분의 아름다운 흔적을 날려 보냈다.
아침,평소대로 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광고물을 지우기 위해서 모두 선택 그리고 딜리트를 눌렀다. 이어 ‘디비(db) 퍼미션이 잘못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게시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호스팅 업체에 도움을 요청하여 하루 종일 복구 작업을 했지만 애석하게도 귀한 자료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프로그램 오류와 합세하여,딜리트 키는 1초도 안 걸려서 어제의 기억들을 하얀 백지로 만들어 버렸다.
몇 번씩 비비고 두들기고 뜨겁게 삶아낸 빨래에도 어제라는 시간의 흔적들은 구석진 솔기마다 조금은 남아 있기 마련인데. 참 허망했다.
아직은 세상사 익숙지 못해서인가,난 어린 시절처럼 연필과 지우개를 다시 챙겨 넣고 다니고 싶다. 조심스럽게 써보고,그 실수를 슬며시 지워도 보고,상대편 실수도 역시 관대히 지워본다. 흐릿하게 남아 있는 흔적들을 추억하면서 아쉬워도 해보고,더러는 부끄러움으로 인한 자기 성찰도 해본다.
딜리트,그대! 우리 가슴 속 시름도 흔적 없이 지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진영 수필가
--------------------
국민일보 에세이 필진 되셨으니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설리님 고운 심성과 아름다운 서정으로
좋은 글 생산하시리라 믿습니다.
감축 드리며. 박수 보냅니다. - 초원님 서재에서 퍼옴
|
|
Home 수필 애호가들의 쉼터, 수필넷 [에세이 아카데미아]에서 찬 한잔의 여유를 느껴보세요~ (☞메인)
좋은 공간~잠시 머물다 갑니다. 
[re]국민일보에세이/이진영-지우개와 딜리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