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빛 아침을 여는 아이들
박은숙
난곡의 비탈진 언덕빼기, 작은 공부방의 아침이 분주하다. 가파른 언덕을 한숨에 뛰어 오른 아이들의 숨찬 얼굴이 불그스레 아침을 열고 갓 피어난 달개비가 수줍은 웃음으로 아이들을 맞는다. 나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제친다. 아이들의 웅성거리던 소란이 멈춰지고 마당 가득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오늘은 공부방 마당에서 아이들과 풍물을 치는 날이다. 방학이 되어도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이 곳 아이들에게 풍물은 또 다른 신바람거리이다. 늦게 헐떡거리며 올라온 은영이가 숨을 고를 겨를도 없이 자리를 잡는다. 풀 잎새마다 아침 햇살이 빛을 내뿜고 바람은 어느새 싱그러운 풀빛 내음을 실어낸다.
'둥둥 둥둥 둥둥둥둥둥둥둥둥.... 둥둥 둥둥 둥∼둥'
북 점고가 울리자 아이들의 표정이 하나하나 살아난다. 세영이의 숨은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작은 체구에 단단한 몸짓의 세영이가 쳐 올린 북소리는 가슴에 응어리진 멍울을 녹여내는 듯한 힘을 지녔다. 그 소리는 어릴 적 집을 나간 엄마를 부르는 무언의 함성처럼 넓게, 멀리 퍼져 나간다. 왠지 가슴 가득 솟구치는 울렁임이 아픔처럼 고인다.
장구에 몸짓이 유연한 은영이의 안경 너머로 햇살이 내비친다. 핏기 없던 얼굴에 어지럼증이 이는지 자꾸만 찡그리며 마음보다 앞선 신명으로 장단을 받아넘긴다. 순간 은영이의 넘기는 가락에는 아빠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금방이라도 대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 환영이 그네를 타듯 가락을 맴돈다.
용호의 춤을 추듯 출렁이는 징을 보며 한바탕 웃음이 신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어제는 풀섶에서 넘어져 풀이 죽어 있던 녀석이 오늘은 징이 되어 온몸으로 신명을 감아 올린다. 징 채를 목으로, 어깨로 휘감아 돌리며 흥에 겨운 소리를 유감없이 흔들어 댄다. 선거 바람에 분바르고 집을 나간 용호 엄마는 선거가 끝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도 용호는 그 엄마 품이 그리워 징으로 칭칭 감아 삼키며 울어댄다. 녀석아! 지난밤이 유난히 길었다는 것 안다. 돌아오지 않는 엄마의 발자국 소리를 쫓아 뒤척이다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토끼잠을 자고 왔다는 것도 알고 말고 지. 네가 밤새 머리에 지어 놓은 새집을 보고 안타까운 고개만 끄덕였단다. '그래 그래, 신명으로 풀어라. 함께 풀어 버리자'
'징찡 징지징 징지징지 징지징 징지징 징지징 징지징지 징지징'
새침하던 정아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더니 이내 뜨거움 속으로 파고든다. 마당삼채의 빠르고 경쾌한 가락을 타고 잦게 몰아가는 정아의 장구소리에서는 단맛이 난다. '궁따따 궁따다 ....' 감꽃이 그리도 곱던 날 정아의 아빠는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너고 하얀 깃발이 펄럭이는 대추나무집에서는 굿이 벌어졌다지. 그래 좋은 곳에 계실게다. 지금쯤 가난의 허리 펴고 편한 곳에서 너의 소리에 귀기울일게다.
"경윤아! 그게 아니 야, 다시 한번, 옳지 그래 바로 그거야!" 연습 때마다 습기가 없어 자주 빠졌던 경윤이가 오늘은 웬일로 달려들었다. 장단이 어려운지 틀릴 때마다 애꿎은 머리만 긁어대며 애를 태운다. 잠시 다른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더니 내키는 대로 마구 두드리며 즐거워한다. 그래 틀려도 좋아. 신나게 두드려 보렴. 좀 틀리면 어떠니? 창피하니? 괜찮다. 괜찮다. 모두 괜찮다. 왕따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경윤이의 마음은 이제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고 있다. '경윤아! 옷이 더럽다고 마음이 더러운 것은 아니다. 연필이 없다고, 준비물 좀 못 챙겨 갔다고 부끄럽니? 아무 것도 부끄러울 게 없다.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흉보는 녀석들이 부끄러운 게다.
'당 다당 다당 당/ 딴 따단 딴단 딴'
두 녀석이 주고받는 짝드름에 아이들은 긴장한다. 이제껏 펼쳐 놓았던 마음의 덩이들을 모두 던져 버려야 할 마지막 호흡이다. 휘모리 장단의 휘감듯 숨가쁘게 몰아가는 소리에는 가슴 찡한 무언의 대화와 화해가 아이들의 마음에 조여들 듯 파고든다. 소란하던 불협화음이 어느새 하나가 되어 신명을 더해 줄달음쳐 나간다. 아이들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숨이 턱에 와 닿는다. 정지된 듯한 호흡에 맺음 가락이 울리고 용호의 인사굿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풀섶에 매달려 있던 사마귀 한 마리도 고개를 번득이며 지친 몸을 고른다.
가쁜 호흡으로 설움에 신명을 더했을 아이들의 아우성이 가슴에 뜨겁게 타올랐다. 내리쏟는 태양을 등지고 풀빛 설움 덩이에 신명을 매단 아이들의 얼굴이 예전과는 달리 빛이 났다. 모두가 비켜간 오물더미, 철거의 벼랑 끝에서 아이들은 오늘도 풀빛 아침을 연다. 떠오르는 해의 마지막 눈부심이 돌아 간 아이들의 자리를 채운다. 아침 햇살이 가득한 공부방 마당엔 아이들의 아우성 섞인 풀빛 땀과 열기가 아직도 흥건하다. 울먹이던 아침 햇살에 낮 달이 뜬다.
▣ 정목일(2004-01-10 06:56)
박은숙 씨의 작품 잘 읽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무난하고 좋은 작품이나 서두부분이 미진한 듯하여 지적하고자 합니다.
1.'난곡의 비탈진 언덕배기'- 언덕배기의 모습, 장소, 풍경에 대한 묘사가 있어할 부분입니다. 작자만이 머리 속에 알고 있으므로 독자에게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이를 눈에 보는 듯이 전달하려면 구체적인 묘사가 필요합니다.
2.'작은 공부방'-방의 크기, 모습, 목적 등의 묘사나 설명이 필요합니다.
3.'갓피어난 달개비'- '달개비'에 비유하게 된 것은 언덕에 달개비꽃이 많다는 등의 배경 설명이 있다면 도움이 됩니다.
문장에 있어서 독자들이 알겠지? 하는 생각을 바꾸어 언제나 독자편에서 글을 써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점만 유의해서 써보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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