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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김 순 재
원천리천 둔치에 개똥참외가 열렸다. 지난 여름 쓸고 간 태풍의 위력에 사막과 같이 변해버린 땅에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모랫바닥에 피어있는 꽃이 빈혈을 앓고 있는 듯 가엾었다. 그러더니 열매도 팔삭둥이다.
누가 따서 버렸는지 밟혀서 깨진 것들이 흩어져있다. 통째로 구르는 것들도 있다. 그 중에는 제법 커서 아까운 생각이 드는 것도 있다. 횡재를 만난 것처럼 땄다가 실망하여 버렸을 것이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개구리참외가 눈에 번쩍 들어온다. 기분이 활짝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짓밟혀 터져있다. 자세히 보니 수박이다. 개똥수박인 것이다. 먹지 못하더라도 보기나 하게 두고 갈 것이지 왜 밟았을까.
어쩐지 쓸쓸하다. 나부끼는 갈대도 적막해 보이고, 쨍 한 가을볕도 버려진 듯 외롭다.
나는 개똥참외를 보이는 대로 따기 시작했다. 다행이 차고간 허리가방에 채워 넣고, 남은 것은 두 손에 받쳐 들었다. 그래도 시기할 사람은 없겠기에 느긋하게 걷는다.
뚝방에서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 한 분이 내려다 보며
“뭣에다 쓸려고 땄소” 한다.
“생명이 맺은 열매라 안쓰러워서…..”
“먹을 것 없던 옛말이지.
할머니는 딴 소리를 한다. 그러면서
“교회 나가셔?”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자, 받아요. 내가 주는 선물이야요”
테니스 공만한 애호박 한 덩이를 준다. 끝물이라 참외로 치면 개똥참외다. 동이만한 할머니의 누렁 호박은 뚝방 옹벽에서 저문 가을볕을 쬐고 있었다.
남편은 결혼 선물로 두 돈 반짜리 금가락지를 내게 주었다. 두 돈밖에 못해줄 형편인데 반 돈을 더해서 끼어주었다.
“다음에 좋은 것으로 해 줄께”
그러고 일 주일 만에 입대를 했다.
나는 남편이 제대하고 돌아오기까지 3년 동안 한 번도 손가락에서 결혼반지를 빼 보지 않았다. 매화꽃 조각은 달아서 밋밋한 금(線)만 남았고, 반짝거렸던 색깔은 구릿빛으로 변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때는 약속의 의미, 또는 순정의 뜻으로 그랬던 것 같다. 언제 빼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그대로 반지곽에 담아서 보관해 왔다. 그러다가 며느리가 둘째 손자를 낳았을 때, 아들을 결혼시키지 못하고 떠난 남편을 대신하여 선물로 주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남편은 형수 밑에서 장가를 들었다. 옹색한 농촌 살림에 결혼 비용으로 얼마를 타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락지를 맞춰줄 때 많이 망설였다. 두 돈으로 쌍가락지를 주문하려니까 금방 주인이 두 돈으로는 외줄반지밖에 만들 수 없고, 서 돈은 가져야 된다고 했다. 두 돈 값을 받아온 눈치였다. 난처해 하던 남편은 결심한 듯, 반 돈을 더해서 두 돈 반으로 쌍가락지를 주문했다. 나는 외줄반지도 무방했건만 그는 꼭 쌍가락지를 해주고 싶어했다. 철이 들었던 남편은 반 돈을 더 보탠 대신, 자기 쓸 것을 줄였을 것이다. 깡마르고 의기소침했던 어머니 없는 신랑이 눈에 선하다. 며느리에게 반지를 넘겨주었지만 어찌 그 반 돈까지 줄 수 있었으랴. 그것은 나 이외 누구도 간직할 수 없는 남편의 마음인 것을. 간 것은 두 돈이고 반 돈은 내 마음 속에 남겨두었다.
약속대로 남편은 좋은 선물을 많이 주었다. 아들 딸을 안겨주었고, 장성시켜주었으며, 늙어서도 안락하게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내게 뿐만 아니고 자식들에게도 좋은 선물을 주었다.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걱정 없이 공부 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평범하지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어 주었다. 그것들은 홀로 가시덤불에 뛰어들어 찢기고 넘어지면서 따준 선물이다. 매달린 어린 것들을 쓰다듬으며 남몰래 다진 의지이며, 흘린 땀방울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병고와 고독을 숨기고서 가족에 대한 책임과 애정을 선물로서 남겨주려 했다. 어찌 반지가 반지일 뿐이며, 유산이 유산일 뿐이랴. 거기에는 내 가정의 내력이 있고, 한 남자의 절절한 일생이 있으며, 자식들의 오늘이 있다. 반지를 며느리에게 준 것은 이러한 것들이 가정의 맥박으로 뛰어 이어지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가교의 역할을 해야 하는 며느리를 귀하게 여기는 내 마음의 표시였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감동했던 선물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린다. 준 사람의 마음도 잊혀진다. 하물며 닳아빠진 두 돈짜리 금반지가 내 가정의 맥박으로 뛰어 이어질 수 있으랴. 서랍 속 어디에서 개똥참외 신세가 되어 굴러다닐지, 커다란 알맹이 곁에서 주눅 들어있을지 모를 일이다. 어느 날 그마저도 누리지 못하고 짓밟혀 깨지는 신세가 될지 누가 알랴.
나도 그랬다. 오만 가지색 아름다운 꽃과 보리밭을 지나는 하얀 뭉게구름과 가슴을 적셔오는 저녁노을. 애닯도록 어여쁜 그 색채가 ‘빛의 고통’으로 빚어낸 선물이란 것을 옛날엔 몰랐었다. 그러니 며느리에게 준 가락지에 대하여 선물 이상의 것을 기대하는 것은 낭만이다.
그러면 남의 집 쇠죽 끓이는 방에서 자취를 하며, 고향 집에서 타온 양식 몇 됫박을 팔아서 차비로 썼던 청년은 어떻게 할까. 금반지 서 돈을 채우지 못해 머쓱했던 신랑은 어떻게 할까. 서러움이 사무쳐, 너무도 사무쳐, 평생 검소와 부지런밖에는 살 줄 몰랐던 바보 같은 남자는 어떻게 할까.
차라리 죽을 때 쥐고 갈 것을 잘못했나 싶다.
개똥참외와 호박을 나무그릇에 담아놓고 본다.
뚝방에다 채소를 심어 가꾸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손사래를 치며 했던 할머니의 말이 맴돈다.
“그런 말 말아요. 키 넘게 엉킨 풀을 다 뽑아 낼 수가 없어서 봄에 불을 질렀지요. 지난 가을에 대강 풀을 베기는 했지만 뿌리까지는 뽑아낼 수가 없었거든”
“쬐끄만 땅이지만 내 동생하고 둘이서 힘들었어”
“또 물 댈 데가 있어야지. 집에서 길어다가 일일이 퍼서 주었어요. 올 같은 가을 가뭄에는 죽을 맛이야. 그저 자라서 그저 따는 것 같아도 여간 힘들지 않아요”
“그래도 호박을 따다가 교인들 점심 국수에 썰어 넣는 재미로 심지.”
할머니의 호박이야말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주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긴 선물이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개똥호박을 받은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을 받은 것이다. 내 남편이 준 금 반 돈도 할머니의 호박과 무엇이 다르랴. 선물은 값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따지는 것이다. 그날, 온 마음으로 준 남편의 선물. 그 서럽고 애틋한 반 돈을 아직도 새것처럼 마음에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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