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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자	(2006-12-22 12:55:53, Hit : 1303, Vote : 144)

도자기를 빚으며

                                        도자기를 빚으며
                                                                                                     유해자(劉海子)

  점토를 늘리고 흙가래를 빚는다. 손에 닿는 흙의 감각, 자연 그대로의 모든 것들이 이런 느낌을 지녔을까. 손바닥을 간질이는 보드라운 흙의 느낌이 좋아 점토를 자꾸만 주무른다. 오늘은 오리 모양의 생선접시를 만드는 날이다. 접시의 테두리를 조금 더 높이 쌓아올린다. 오늘 만드는 용기엔 바닥에 자잘한 흰 자갈을 깔고 물을 담아 꽃잎을 몇 개 띄워 놓아야지. 생각만으로도 흙을 만지는 손길이 즐겁다.

매주 금요일, 숲 속에 있는 작은 공방의 뜰에 둘러앉아 흙을 주무른다. 초급반인 우리는 강사의 계획표에 따라 접시를 만들고 컵을 만들고 꽃병을 만든다. 그러나 나는 강사가 내놓은 견본을 그대로 따라하지 않는 불량 수강생이다. 컵을 만들 때는 컵을 변형한 꽃병을 만들고, 접시를 만들 땐 운두를 높여 수반(水盤)을 만든다. 순수한 흙 앞에서조차 나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

주어진 시간이 끝난 후에도 손을 떼지 못한다. 이리저리 돌려보며 다시 안쪽 표면을 다듬고 겉의 무늬를 매만진다.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한 애착이다. 마치, 생명이 있는 오리 한 마리를 탄생 시키고 있는 기분이다.

며칠 전, H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도예전에 갔다. 작품들은 대체로 실용품에 예술성이 더하여진 생활자기들이었다. 그 가운데 몇 점은 실용성과 상관없이 설치미술을 연상케 하는 작품도 있었다. 그것은 도예를 이용한 현대미술의 또 다른 장르처럼 보였다. 전시된 작품 중 가장 눈길이 갔던 것은 독특한 디자인의 주전자였다.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찌그려 놓은 듯 한, 실용성보다는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납작한 몸체에 작은 뚜껑이 앙증맞았다. 이렇게 개성과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을 볼 때면 심미적 쾌감을 느낀다. 그 쾌감은 생활의 에너지로 전환되어 그날 하루를 즐거움 속에 있게 한다.

실증나지 않는 도자기의 미(美). 빗살무늬 토기부터 현대 자기까지 그 강한 끌림은 모태인 흙의 기운 때문이리라. 수분에 젖었을 때는 어떤 형태가 되든지 자신을 만드는 이의 손길에 내맡겼던 흙이 1200˚C가 넘는 불가마 속에서 구워지고 나면 전혀 다른 얼굴을 한다. 부드럽던 바탕은 오간데 없고 단단함이 차라리 깨어질지언정 변형을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고통을 거쳐 탄생되는 걸까. 시뻘건 불구덩이 속에서 달구어지고 금이 가는 아픔을 겪으며 한 덩이의 점토는 도자기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손에 묻은 점토를 수돗물로 씻어내며, 나는 나를 지으신 이를 생각한다.

나 또한 조물주의 손에 맡겨진 한 덩이의 흙이었으리라. 내가 접시 하나에 이렇듯 공을 들이니, 나를 빚은 그 분의 손길이야 어떠하였으랴.

나는 애초에 어떤 모양으로 빚어졌을까. 꽃병이었을까, 항아리였을까, 대접이었을까, 아니면 작은 종지였을까. 무슨 용도에 쓰려고 만들어진 용기일까.

미끈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나의 외모는 내가 아름다운 꽃병으로 빚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속내가 좁아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나는 큼직한 항아리도 아닐 것이다. 건강이 부실하고 나약한 나는 질흙으로 빚어진 자그마한 종지인지 모른다. 기왕이면 “거슬리지 않는 파격을 지닌” 청자연적쯤으로 빚어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윤기 없고 투박한 질그릇이라면 넓은 대접이라도 되게 하든지. 이렇듯이 불평이 많은 것 또한 분명 내가 작은 종지라는 증거이리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이 공방의 뜰을 거쳐 오월의 숲으로 퍼져 나간다. 문득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 심히 좋았더라.”고 쓰인 창세기의 구절이 떠오른다. 심히 보시기 좋았다는 것은 창조하신 분의 마음에 꼭 들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 또한 박물관의 세련된 청자연적이 아닌 볼품없는 종지일지라도 나를 지으신 그분의 마음에 흡족하게 빚어진 존재일 것이다. 내가 실용성 있는 컵이나 접시를 만들지 않고 내게 필요한 꽃병과 수반을 만들면서 정성을 기울이듯. 나는 창조주의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유용한 용기이다. 담기는 것이 한 숟가락의 양념이면 어떠랴. 종지가 없어 한 숟가락의 양념을 커다란 대접에 담아 상을 차린다면 상차림의 조화는 깨어지고 볼품이 없게 될 것이다. 용량에 따라 역할이 다를 뿐 우열의 차이는 아니다. 각자의 크기에 맞는 몫을 감당하며 저마다 타고난 모양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세상살이의 조화가 아닐까. 이렇듯 때로는 생각의 전환과 자족(自足)의 마음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오늘 내가 만든 오리모양의 수반이 놓일 자리를 생각하며 공방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에세이21, 2005년 여름호>

           유해자:
         57년 충북 단양 출생
        1999년 <수필과 비평> 등단.
         한국 문인협회. 한국 수필가협회. 수필과 비평 작가회. 새한국 문학회회원.

sysop (2008-02-22 15:02:21)

소피아 (2006-12-22 17:20:24)

도자기를 소재로 한편의 향기로운 수필을 빚으셨군요. 잔잔한 감동이 한줄기 연무처럼 가슴으로 피어오릅니다.
감사합니다. 유해자님, 어제 옆자리에서 반가웠습니다. 앞으로 자주 사이트에서 뵐수 있겠지요..^^ (작가별수필검색창에도 등록을 했으니 그리 아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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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자 (2006-12-24 01:43:31)

소피아 선생님. 잘 다녀 가셨어요. 오래전에 홈페이지를 몇 번 방문했었는데 컴퓨터를 바꾸며 주소를 잊어버리기도 했고, 제가 보기와 달리 좀 원시적이어서 온라인 세상에 익숙해지지가 않습니다.
사진으로만 뵙다가 직접 뵙게되어 반가웠습니다.
수필의 뜰에는 글을 첨ㅂ

유해자 (2006-12-24 01:51:38)

수필의 뜰에는 글이 첨부파일로 끌어올 수도 없고 복사도 안 되서 쉼터에다 올렸습니다. 선생님만 두 번 일하시게 한 것 아닌가요.

소피아 선생님,
복된 성탄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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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2006-12-24 10:11:36)

메리 크리스마스~ 해자 선생님,

유해자님 글 향기의 여운이 은은히 오래가서, 오늘 아침상 차리면서 주방 그릇을 보면서도 도자기를 빚고 수필을 빚는 해자씨 단아한 모습이 잠깐 떠올랐었는데, 이렇게 꼬리글을 남겨놓으셨네요. 반갑구요..^^
요즘도 도자기 빚으시는지요..? (창의적인 도자기..?)

이 사이트 게시판이 성능이 좋더라구요. sysop비번으로는 크릭 한 번에 게시물 이동, 복사가 다 된답니다..^^

동아리 외부에 아직 공개하고싶지않은 글은 여기 동아리창자마당에 올려놓고 퇴고를 하시면 되구요, 공개하실 때는 쉼터나 수필의뜰을 사용하시는게 좋아요. 가끔은 들려주시면 좋겠구요..^^

즐거운 성탄 보내시고 새해 더욱 좋은글 빚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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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2006-12-24 11:01:26)

메~리 크리스마스~~~

유해자 (2006-12-26 16:12:14)

이 예쁜 왕눈이 아가씨는 어쩜 이리 절을 잘할까? ㅎㅎ
모두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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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op (2006-12-26 16:47:53)

네, 해자 선생님.. 반가...^^
저 이미지의 눈 정말 큽니다..^^ ㅎㅎ...
늘 멋들어진 소재로 멋진 글을 빚으시는 유해자님~^^
연말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희 가족은 내일 속초 가족여행 떠납니다.
지금 준비하느라 조금 분주하네요..^^
쉼터의 해자님 선물같은 글 여행 다녀와서 차분히 잘 감상할께요.
해자 선생님, 교수님과 동아리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무수무량

▽ 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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