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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형(2016-10-12 14:49:55, Hit : 731, Vote : 96
 여석(餘石)

여석(餘石) / 김선형    

언제 들어도 설악산 울산바위의 전설은 기발하게 엉뚱해서 재미있다. 태초에 금강산을 만들 때 일이란다. 금강산을 일반 이천 봉의 아름다운 산으로 만들 요량으로 천하의 바윗돌을 모집하였는데 울산의 한 바위도 참여하기 위하여 올라오다가 설악산에서 잠깐 쉬는 사이, 이미 봉우리가 다 찼다고 하여 그대로 주저앉았다고 한다. 그래서 울산바위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의 울산바위는, 일만 이천 봉우리를 만드는 데 쓰이지 못하고 남은 돌, 여석(餘石)인 셈이다.
기록을 보면,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외침을 막고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성벽을 쌓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강대국 사이의 한복판에 있어, 늘 외침에 시달려왔던 우리 민족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성벽을 쌓는 데는, 그에 쓰이는 돌을 모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서울 주변의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도 국력을 집중하여 돌 모으는 일에 나서야 했다. 1624년 인조 때 남산산성을 축성할 때는 특별히 8도 승군(僧軍)을 조직하여 그들이 돌 모으는 일까지 맡게 하였다. 그리하여 모아진 돌들로 성을 쌓아 나라를 지키는 방패막이로 삼았다. 여기서 모아진 돌 가운데 성벽을 쌓고 남은 돌, 뽑혀 쓰이지 못한 돌도 여석이다.
여석은 쓰이지 못하고 남은 돌이다. 전설의 울산바위처럼 무슨 사정으로 기회를 놓쳐서 쓰이지 못하게 되었거나, 축성의 경우와 같이 나라의 초석으로 쓰일 수 있는 기회를 얻고도 뽑히지 못한 것은 모두 여석의 범주다. 그 이유가 자기 실수이든, 모자람이든 상관없이 뽑혀 쓰이지 못한 돌은 여석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여기서 말하는 여석은 제외나 탈락이라고 해야 하지만, 덕이 높은 옛 선현들께서 돌까지도 배려하여 남은 돌로 치부했는지도 모른다.
내 호(號)는 여석(餘石)이다. 나는 1976년 여름방학 때 오대산 월정사 탄허 스님의 배려로 당신의 거소였던 방산굴에서 학위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그때 스님으로부터 받은 호가 여석이다. 그래서 나는 여석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호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가까운 벗이 고희기념문집 원고를 부탁하면서 아호를 적어달라고 했을 때도 무호(無號)라고 썼을 정도였다. 쓰이지 못한 돌, 여석을 드러내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누가 혹시 호에 ‘씨’자를 붙이는 것이 거북해서 “여석 선생”이라고 부르기라도 한다면 버거울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내 이름 하나 감당하기도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허물없이 가깝게 지내는 두 동학(同學)에게 호 얘기를 하게 되었고, 그들로부터 스님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좋은 아호라면서 사용할 것을 권유받게 되었다. 나도 두 벗의 의견에 공감이 가고, 여석은 여생의 길잡이가 되지 싶어 앞으로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탄허 스님께서 내 호를 여석으로 지어주신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을 들어 설명하셨던 것으로 보아, 쓸모없이 버려진 돌의 의미한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무용지용은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 얼핏 보아 쓸모없는 것이 시절인연을 만나면 쓸모 있게 된다는 뜻으로 짐작하고 있다. 쓸모없기(無用) 때문에 쓸모 있는(有用) 기회가 오는 것인데, 범부(凡夫)들은 유용에만 매달리면서 무용의 용을 모른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이 여석의 함의라는 것이었다.
나는 스님을 오랫동안 혼을 일깨워주신 스승으로 모셨고, 당신께서도 “김 군은 내 자식”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지만, 나에 대한 호칭은 “김 군”이었고, 우부(愚夫), 맹꽁이, 밴댕이 소갈머리였다. 여석 수준도 밑돈 것이었다. 실제로 스님의 나에 대한 평판은 눈물을 글썽일 만큼 엄중하였다. 너무 날카롭고, 조급하고, 난 체하면서 까불고, 방정맞고, 한이 없었다. 그래서 스님께서 무용지용의 여석의 묘리를 가슴에 새기고 살라는 뜻으로 지어주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석으로 살라는 당부의 뜻이 담겨있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이 새삼스럽게 자꾸만 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나온 내 인생은, 무용지용의 여석이기를 거부한 삶이었지 싶다. 나는 문명의 빛이 가려진 채, 소망이 시들어가는 벽촌의 음지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랐다.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공부에 매달리는 것뿐이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학문의 길로 나가는데 쓰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나는 학문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그 길에 도전했고, 인생을 걸었다. 내가 학문에의 길에서 여석으로 머문다는 것은, 내 혼이 숨 쉴 수 있는 터전이 소멸한다는 의미일 터였다. 무용지용 타령이나 하고 있기에는, 나는 여유가 없었고, 그래서 쓰이지 못한 돌, 여석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세월은 흐르는 것이고, 세상도 인간도 변하게 마련이라고 했던가. 나도 그 한계 속에 있었던 모양이다. 지나온 세월의 흐름에 따른 변화와 바뀜 속에서 여기까지 떠밀려오게 되었고, 이제 겨우 철이 날만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는 한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도전이며 쓰인다는 것도 한낱 덧없는 것이었던 모양이고, 그것마저도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같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모든 것은 한때, 그 시절 일일 테고, 어떤 돌이 뽑혀 쓰여서 햇볕을 보았던 때가 있었다면, 박힌 돌, 얽매인 돌, 써먹은 돌이 되어 자유를 잃고 가능성을 막아버린 그늘도 경험해야 했지 않았겠는가. 그것이 사물과 인생에 담겨있는 양면성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내가 무용지용의 여석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로 마음먹기까지는 30년도 더 걸렸다. 그것도 유용(有用)의 가능성이 차단된 칠순의 남은 돌로 내몰린 뒤의 일이다. 삼십수 년 전에 들었던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며, ‘잘 생긴 나무는 일찍 베인다’는 말이 귀에 들어온 것은, 무용(無用)의 고목(古木)이 되어가는 길목에서였다. 그래도 나는 일하는 것이 그대로 노는 것이 되는 장자의 경지까지는 언감생심 바라지 못한다고 해도, 힘이 다 빠지기 전까지는 무용지용의 여석만은 붙들고 있을 참이다. 그것이 여석의 열린 여생이어야 하니까.





정류장에서
오지병(鳥只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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