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金 志 修
감나무를 보아야만 가을을 실감한다는 친구가 있다.
과연 잎을 모두 떨군 나무에 주홍빛 감만 주렁주렁 매달린 것은 가을의 상징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한동안 잊고 있었던, 스무 살이 넘도록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향집 감나무가 생각났다.
넓은 마당 한쪽엔 잘 생긴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큰 오라버니가 초등학교 졸업 때(일제시대) 상으로 받아온 나무라 했다. 뒤채의 대추나무와 밤나무와는 달리 앞마당에서 특별대우를 받는 것은 그 때문 인 듯싶었다.
어른 주먹보다 더 큰 감은 꿀같이 달았다. 눈 내리는 겨울밤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먹을 때면 말없이 엄하기만 한 아버지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며 농담도 건네셨다. 그 감 이름이 봉옥이며 일본말로는 하찌야라는 것도 근자에 알게 되었다.
여름철이면 감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그 밑엔 늘 평상이 놓여있어 손님을 맞는 응접실이 되고 저녁엔 식당도 되었다. 안방에서 하던 식사를 평상에서 하면 반찬이 없어도 밥맛이 절로 났다. 감나무가 주는 또 다른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다 혼자서 집을 보는 날이면 감나무 밑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나뭇가지사이로 보이는 파란하늘과 흰 구름은 더 이상 잘 그릴 수 없는 그림이 되어 어린마음에도 감탄을 하곤 했다.
감은 해거름을 했다. 누렇게 빛깔은 익었으나 덜 익은 땡감을, 친구 재영이와 함께 몰래 따먹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체하면 약도 없다고 말리셨지만 간식이 궁한 그 시절에 땡감은 어린 입맛을 유혹 했고, 입 속에 남아있는 떫은맛은 김칫국물을 마시면 해결이었다.
그 후 세월이 이삼십 년 흐르는 동안 나는 고향집 감나무를 잊고 살았다. 가을이 깊어지고 큼직한 홍시가 시장에 나오면,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에도 저런 감이 열렸었지...’ 하는 생각이 한번 씩 스쳐 갔을 뿐. 그런데 감나무는 가을의 상징이라는 친구의 말에 잊었던 고향이 살아난 셈이다.
지금 고향집은 병원이 되었고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떠나게 된 사연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 감나무를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외국차관을 얻어 목장을 하겠다는 오빠를 위해 집을 담보로 아버지는 보증을 스셨다. 정확한 설계와 치밀한 계획서를 믿었다기보다 아버지는 자식을 믿었을 것이다. 긴 시간에 걸쳐 일은 어긋나고 집은 끝내 경매에 붙여졌다.
아버지는 건축업이셨음에도 내가 살고 자란 집은 좋고 예쁜 집은 아니었다. 허나 집은 굉장히 컸다. 안채와 뒤채가 있었고, 어쩌다 밤중에 안채에서 언니들이 있는 뒤채로 가려면 마당을 거쳐야 했다. 공터에 쌓아놓은 목재들은 밤이 되면 그로데스크한 조형물이 되어 차려 자세로 서있는 괴물 같았다. 무서워서 막 뛰고 나면 소름이 돋고 가슴이 쿵쾅거려서 ‘집 마당이 왜 이리 클까, 학교 운동장 반만 하지 않나?’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고향집 양쪽엔 커다란 창고가 있었다. 하나는 가을에 추수된 곡식을 저장했고, 또 하나는 건축에 필요한 자재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고향집을 떠나던 날, 아버지의 허망한 눈빛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리다. 모든 식구들이 떠날 준비를 하고 밖에서 기다리는데 아버지는 나오시지 않았다. 감히 아무도 나오시라고 말하지 못했다. 잠가놓은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아버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펄펄 뛰고 계셨다. 억장이 무너진들 저보다 더할까. 아버지의 모습에 우리는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한쪽에 모여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버지는 밖에 대기시켜놓은 자동차는 본 척도 하지 않고 평생 아버지의 두발이 되어주었던 낡은 자전거에 오르셨다.
집이란 한 가정을 책임진 가장의 역사다. 아버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손수 터를 물색하고, 손수 지은 집인 만큼 대를 물려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오십 여년의 기쁘고 슬픈 사연이 곳곳에 묻어있을 집.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육이오 전쟁 통에도 피난을 하지 않았다. 가족들만 해변이 보이는 친척 산골 집에 피신시키고 고향집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떠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군내는 물론, 도내의 여러 학교 건물을 지으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새 일을 시작 할 때마다 장독대에서 아침저녁으로 빌었다. 오빠와 언니들이 타지의 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러갈 때도 어머니는 그렇게 빌고 있었다. 장독대 앞에는 아기채송화가 각가지 색깔로 키 자랑을 하며 피어있었다. 감나무는 그 옆에서 집안의 모든 일들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수문장이며 터주 대감이다.
이제 형제들이 모이면 가끔씩 감나무 이야기를 하곤 한다. 셋째 언니는 떠나올 때 캐왔어야 한다고 말했으나 내 생각은 다르다. 감나무가 고향집에 있는 것은 나의 피붙이가 그 집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버지가 집을 어떻게 지었는지, 어떻게 성공하고 실패하였는지,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서 결혼한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감나무가 있는 한, 그 집은 우리 집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얼마 전 친구가 부모상을 당하여 경상도 김천을 가게 되었다. 그 동네에는 유난히 감나무가 많았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고즈넉했고 잎을 모두 떨 군 감가지에 매달린 감들은 벼 낟가리들과 어울려 살아있는 한 폭의 동양화를 만들었다. 가을 저녁 들판에 노을빛을 받고 서있는 감나무는 단순히 나무가 아니다. 땅을 지키는 농부의 얼굴이기도 하고 그 동네를 지키고 있는 어른의 모습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삶의 마감에 앞서 할 일을 마친 여유 있는 사람들의 모습 같았다.
친구는 생각이 있으면 감 가지를 꺾어 가라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감나무를 꺾는 것은 농부의 팔을 꺾는 것 같았고 고향집 감나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감나무를 보아야 가을을 느낀다던 친구는 잊고 있었던 고향집을 찾아주었다. 비록 지금은 남의 집이 되어 다시 볼 수 없지만 잊어서는 아니 되고 잊을 수도 없는 내 마음의 고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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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96년에 창작수필에 '노각'으로 등단.
제 6회 창수문인회에서 '곁의 여자'로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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