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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환(2022-08-06 18:46:11, Hit : 55, Vote : 0
 내 인생의 멘토




내 인생의 멘토

吳  岐  煥

   나라가 어지러울 때 존경받는 원로가 그립고 개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 ‘지혜와 신뢰로 이끌어주는 조언자’가 그립다고 한다. 그럴 때일수록 속마음까지 다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그리워진다고 한다. 그런데 대학에 강사와 교수는 많은데 스승이 없고, 수강생은 넘치는데 제자는 안 보인다고 한다. 살아가면서 ‘진실한 조언자’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가 그리운 세상이다. 하지만 살다보면 삶의 고비마다 밀어주고 당겨주는 좋은 조언자, 인생의 멘토가 있어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상 속으로 나가기도 한다.

  6∙25전쟁이 일어났던 그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고모가 농토를 팔아가지고  떠난 뒤 화병을 얻어 그길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큰형님은 피난을 떠났고 둘째 형님은 군복무 중이었다. 막내가 상주가 되어 장례를 모시고 어머니와 대전으로 이사를 했다. 내 나이 13살, ‘국민학교’ 6학년이었다. 졸작「유산」은 이런 가족사를 소재로 한 글이다.

  그해 대전에 있는 D중학교에 합격 하였으나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막막했다. 진학을 포기하고 둘째아버지 댁에서 한문을 배웠다.『동몽선습언해』,『명심보감』을.  글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내 또래 학생들이 걸어오는 것을 보면 뒷골목으로 몸을 피했다. 보자기에 싼 한문책을 옆구리에 끼고 그들과 대면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다. 아예 그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골목길로 다녔다. 골목길은 나의 피마避馬골이었다.

  우리가 세 들어 살던 집주인은 국군장교였다. 자기가 근무하는 군부대에 사환으로 취직을 시켜주었다. 새벽같이 나가서 세끼 식사를 군부대 식당에서 해결하고 늦게야 돌아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린애가 군인들과 같은 양의 밥을 먹는데도 먹고 나면 금세 배가 고팠다. 헛헛했다. 궁리 끝에 주방아주머니 보고 “국이 짜서 그러는데요 밥 좀 더 주세요.” 라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네가 많이 주렸구나!” 라면서 주걱으로 꾹 꾹 눌러서 한 그릇을 더 퍼주었다.

  그 뒤부터 내 차례가 오면 밥을 꾹꾹 눌러 퍼주었다. 빈 그릇을 가져오면 또 퍼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한 달이 지났던 것 같다. 그제야 속이 찼는가, 헛헛함이 진정 되었다. 얼굴에 도독이 살이 오르고 살결도 뽀얘졌다. 어쩌다 밖에서 식당아주머니를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도망치듯 내달렸다. 지금에 와서 아무리 기억을 살려 봐도 그 아주머니의 얼굴 윤곽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밥그릇을 주걱으로 꾹 눌러 퍼주던 그 마음은 기억하고 있다. 그분은 몸도 마음도 허기진 소년에게 속을 차게 해준 분이었다. 내 어려운 형편을 알아차리고, “네가 많이 주렸구나!” 하면서 밥 한 주걱으로 힘을 길러 준 후원자, 나눔과 베품을 심어준 내 인생의 멘토였다.

  군부대에서 잔심부름 하고 구두 닦고 청소하는 것이 내 일과였다. 월급날이 오면 군인들이 돈을 모아 주었다. 돈을 받아들고 집으로 가는 길에 영수학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배가 부르니까 보였다. 그제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날로 등록을 했다.


  어느 날, 영어 선생님이 어깨를 툭 치면서 교무실로 오라고 했다. 내 사정을 알고

있던 선생님은 “수업 끝나고 교실청소를 하면 학원비를 면제해 주마.”라고 했다. 또 얼마 뒤에는『통신강의록』한 권을 주면서 이 책을 정기구독해서 중학교 검정고시준비를 하라고 했다. 합격하면 고등학교에 갈수 있다면서. 선생님은 내가 짐작도 못한 일들을 다 알고 계셨다. 내가 가야할 길을 알려 주었다.

  그날부터 그 길을 좇아 걷고 또 걸었다. 어머니가 삯바느질하는 옆에서 통신강의록을 펴놓고 밤이 이슥하도록 읽고 또 읽었다. 식당아주머니는 배를 채워주고 영어 선생님은 머리를 채워주었다. 그들은 어리고 힘없는 내가 딛고 일어설 어덕이었다.

  이듬해 검정고시에 응시했다. 합격이었다. 준비 한지 1년 만이었다. D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국민학교’ 졸업 동기와 같은 학년이 되었다. 지난 3년은 한문을 배우면서, 군부대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영수학원 다니면서, 검정고시 준비를 하면서  보냈다. 교복에 모자 쓰고 가방 들고 학교 가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던 세월이었다. 이제는 한문책을 보자기에 싸들고 피마골로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모두가 영어선생님 덕분 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공무원시험에 응시했다. 합격이었다. 공무원에 임용된 뒤 영어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내가 졸업한 D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게셨다. 반갑게 맞으며 “잘 됐다. 참 잘됐어. 그런데 말이야, 야간대학에라도 입학해서 공부를 계속 해야지. 꼭이다. 참, 너 문예반장 했었지? 열심히 해서 릴케 같은 시인이 돼야지…” 라면서 등을 도닥여 주셨다.

   이렇듯 영어선생님은 내 어려운 사정을 알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도와주고 지도해 준 스승이었다. 졸업한 뒤에도 마음을 열고 선생님과 내면으로 깊은 교제를 하면서 지냈다. 그분은 나에게 자존감을 심어준 최초의 조언자였다. 그분의 뜻을 좆아 2년 뒤에 야간대학에 입학도 했다. 선생님은 내 인생의 멘토였다.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를 한지도 십여 년이 지났다. 다행스럽게도 군부대 식당아주머니와 영어선생님과 같은 조언자가 있어 인생의 어덕을 넘어 별 탈 없이 남은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한 뼘 밖에 남지 않은 인생길’ 을 걸어가면서도 가끔씩 허전하고 외로움을 느낀다. 아내도 있고 자식들도 있고 귀여운 손자 녀석들도 옆에 있는데….

  그러니 인생이란, 인생길이란 끝나는 그날까지도 붙들어주고 밀어주는 멘토가 필요한 것인가 보다.                                             2010. 5. 5 (14.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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