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지「상황문학」제3집 2005년 10월 발표작- 10편/6편
시인의 바랑 / 도이 김재권
나락 한 섬도 되지 못하는
시인의 이름이여,
글을 써서 버는 것보다
몸을 써서 벌어야 하는
바랑인 것을,
너는 언제까지 그 죄를
짊어지고 가겠느냐.
길바닥에 널브러지어 흔한
시인의 허울이여,
글과 뒹구는 열정보다야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소중한 것을,
너는 언제라야 그 짓을
그만하고 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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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정 연서(春情 戀書) / 도이 김재권
보시어요, 그 어느 여름날 백련사 내려오는 길 텃밭에 곧게 뻗어 실한 고추밭 푸름이 왜 이리도 간절한지요. 달뜬 마음 못 이겨 텃밭으로 나갔지요. 공연스레 들어가 이 고추 저 고추 모다 만지고픈 심사는 또 무엇인지요. 저기 들길 지나 하 많이 열려있는 가지 밭이 그리운 사연을 아시는지요. 아, 아 튼실하니 잘 생기고 미끈하니 좋아라! 거기, 제일 큰 가지랑 임 닮은 고추랑 치마 속에 담아왔지요. 워메! 좋은 거!
보시어요, 그 어느 가을날 서해바다 명암 갯바위 틈 안에 깊이 숨어 살던 홍합을 캐었지요. 실하기도 하여라. 요염도 하여라. 잘 빠진 자연산이라 그대로 바닷물에 끓였더니, 한껏 벌어진 홍합 새 촉촉한 속살에 어찌나 열이 나든지요. 가슴을 떨며 하나, 둘, 셋, 설렘으로 맘껏 따먹었지요. 살빛 진한 것이 가무레하여 보드라운 살맛은 어찌 그리 좋은지 아, 아 그날 밤 임이 그리워 밤이 새도록 뒤척이었지요. 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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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寄生) / 도이 김재권
Ⅰ
나는 기생한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유배시킨 나의 무능을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하게 위장한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나의 숙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배지에서 얻은 터득이다. 이제 나는 새로운 숙주를 만드는 일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의 숙주가 될 부나비들은 오늘도 나를 엿보려 하고 있다. 적당한 때, 그저 못이기는 척, 그 척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 행위는 나 자신의 삶 보험을 드는 것과 같으니 무엇이 어렵겠는가.
Ⅱ
나는 기생한다. 곳곳에 널려 있는 위선의 부나비들이 어디 하나 둘이던가. 끊임없는 물밑작업으로 미끼를 던져야 한다. 드러내지 않고 그러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나 역시 그 행위에 대해서는 일체의 말을 하지 않겠지만 지나간 부나비들 또한 어찌 대놓고 말을 하겠는가. 그러니 언제든 새로운 부나비들이 내게 관심을 가질 수 있게 가능하면 나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얼굴 없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미화시켜 아주 은밀하게 고상한 척 자리 지킴을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Ⅲ
나는 기생한다. 한 마리의 부나비만으로는 아니 된다는 것이 기생하면서 얻은 터득이다. 이왕이면 여럿을 상대하여야 한다. 그래야, 혹여 위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 전국 각지의 부나비들이 지원을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입금되는 순서대로 제각각 똑같은 말을 해주어야 한다. “오, 오 나의 부나비, 연락할 사람이 그대밖에 없었어요.” 이참에 아예 더 넓은 글월 수풀에 나가 더 많은 부나비를 끌어들여야겠다. 은밀한 유혹, 적당한 행위, 지원금 접수. 아, 아 땀 흘려 일하는 것보다 이 얼마다 쾌감을 주는 일인가.
Ⅳ
나는 기생한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싫증이 나거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 이상 도움이 될 수 없는 부나비에게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일체의 교류를 끊어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 언제든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기 마련이다. 그래도 그 부나비가 혹시 뭔 소리를 하고 다닐지 모르니 할 수만 있다면 그 부나비를 알고 있는 주변 부나비에게 적당히 변명을 해두어야 한다. 나는 만난 적이 없다고,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한다고, 냉정하게 아주 냉정하게 철저히 외면하면 되는 것이다.
Ⅴ
나는 기생한다. 그래도 나를 힘들게 하는 부나비가 혹여 있다면 ‘그 부나비의 행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라거나, ‘싫다는 대도 자꾸만 나를 귀찮게 한다.’라거나, ‘내게 흑심을 품었다가 뜻하는 대로 안 되니 이제는 스토커가 되어 나를 괴롭히고 있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려야 한다. 그리하여 다른 부나비들이 나의 실체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도록 미연에 방지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뒤에서는 무슨 짓을 했든 나는 언제나 교양 있고 고상한 아름다운 여인으로 비쳐야 하니까.
Ⅵ
나는 기생한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나의 숙주인 부나비를 자꾸만 만들수록 내 삶은 그만큼 여유로워질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작업과 행위. 내가 이렇게 기생하며 사는 줄은 그 누구도 모를 테니 언제나 철저한 위장 속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나의 숙주 만들기는 계속될 것이고 운이 좋아 진짜배기 부나비 하나 걸리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리라. 글월 수풀은 넓고 부나비는 많다. 아, 아 나는 자유인이다. 오, 오 신이여,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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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애수(哀愁) / 도이 김재권
논산을 지나 전주를 지났다.
으음, 바로 저기가 정읍사의 정읍이군.
낯익은 호남터널 700m 앞 산자락을 들어서니
서산에 기울어진 겨울 해는 볼 수가 없었고
어스름하니 계곡엔 고요한 정적만 있을 뿐.
그리고는 바로 푸른 댐이 있는 장성이야.
무등산을 뒤로 빛고을 광주를 지나니
배꽃 아리던 나주가 보이던데
아, 아 이를 어째! 유채꽃 피던 영산포야, 영산포!
기어이 또 영산강을 건너고 말았어.
못다 핀 유채꽃의 향유 아직도 게 있나 봐.
차마 말의 목을 베지 못하여
머뭇대는 유채밭 꿈길이라니.
노을 한 자락 드리운 영산교가 흐리다.
“내가 밉지요?”
“후, 후 밉지! 밉지! 아주 많이...”
“알아요, 나도 알아요.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그리움은 더더욱 그렇고요.”
노을빛이 사윈 영산포가 어둡다.
‘잘살아, 잘살아야 해!’
유채꽃 피는 강기슭 모래성에서
홀로서기가 너무나 아픈 선홍색 들꽃의 사연.
‘가여운 선수화, 그리울 유채꽃...’
눈바래기로 한없이 눈물짓는
농연(濃緣)의 슬픔 뒤로
먼 훗날 희어진 머리카락을 볼라치면
그때도 기어이 저리 눈물을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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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포(雪有浦)의 소녀 / 도이 김재권
꿈 안에서는 자주
설유포의 소녀를 만납니다
뜨거운 입맞춤에
시공을 초월한 나의 그녀는
언제나 내 안의 작은 포구가 됩니다
눈 내린 하얀 날
순백의 머리띠를 하고 다가와
가끔은 외롭게도
더러는 힘들게도 하지만은
그러는 그녀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나를 달뜨게도 하여
나는 그녀의 심해에
힘찬 깃발을 꽂습니다
격정의 밀물과 함께
파도를 타던 그녀는
끌어 오르는 심해수를
주체하지 못한 채
숨 가쁜 소리를 내며
찬란히 물마루를 떠다닙니다
그러한 나는
순간에 태풍을 일으켰는데
그녀는 솟구치듯
파도의 거품을 헤집고
해일의 폭풍을 타고
올림포스로 날아올라
마침내 포세이돈의
트리아이나를 보았다고
제우스와 헤파이스토스와
아프로디테를 만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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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도이 김재권
어머니,
회암사 가는 길 텃밭에 그 목화밭은
아직도 여전하든지요.
어린 시절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회암리 고갯길이 생각나요.
중학교 때던가요?
어머니랑 단둘이 갔던 회암사 법당 앞에는
무궁화꽃이 얼마나 많이 피어 있든지.
천보산에
봄이 오면 개울가에 핀 버들강아지
여름이면 산나리꽃 꺾어 손에 쥐고
가을에는 떡갈나무 곱게 물이 들어
겨울 숲에는 소나무 소리가 들리던
어머니 그곳에서 가재 잡던 어린 소년은
지금 어디로 갔나요?
어머니, 그거 기억나세요?
여름에 가는 회암사 풍경 말이에요.
절에 가는 길가에는
아담한 원두막이 있는데
아버지는 늘 그곳에서
싱그러운 참외를
참 많이도 사주셨지요.
그래서 회암사 가는 여름이면
먼저 참외 생각이 달게 나고는 했지요.
어머니,
그새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어요.
그때 소년이었던 아이는
벌써 오십의 나이가 되었으니
오늘 밤은 어머니 생각만 하다가
잠이 들게요.
어머니, 건강하셔야 해요.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어머니, 어머니!
※ 동인지「상황문학」제3집, 총 10편의 발표작 중 6편을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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