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 론 ─
철학수필, 과연 가능한가
황 필 호
1. 머리말
2. 문학과 철학은 각기 다른 방법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3. 문학과 철학은 ‘평가적’으로 같지만 ‘분류적’으로 다르다
4. 철학수필, 왜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1. 머리말
나는 ‘수필과 철학’1), ‘문학과 철학의 관계 : 문학철학을 위하여’2) 등의 글에서 수필과 철학의 관계를 친척관계라고 주장하고, ‘수필철학, 왜 지금 필요한가’라는 글에서는 ‘오늘날 수필철학은 화급한 시대적 요청’이라고 주장했다.3) 그러나 나는 이 과정에서 수필철학의 가능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주장을 전개했던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그 가능성 자체를 토론하려고 한다. 도대체 기행수필, 자전수필, 생활수필 등과 다른 철학수필이 따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당연히 철학수필의 정확한 개념규정을 전제로 해서만 논의될 수 있으며, 이 논의는 다시 철학수필뿐만 아니라 철학소설과 철학시 등을 포함하는 철학문학의 정확한 개념규정에 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도대체 철학문학이란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문학적 철학(혹은 문학철학)과 철학적 문학(혹은 철학문학)을 구별해야 한다. 전자는 형이상학이나 인식론과 같은 철학의 한 분야로서의 문학철학이며, 후자는 철학소설이나 철학시와 동격으로서의 철학수필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철학의 한 분야인 실존철학의 저서라고 한다면, 그의 『구토』와 『벽』은 실존철학의 저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철학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철학의 한 분야로서의 분석철학과 철학적인 방법으로서의 철학적 분석의 관계와 비슷한 것이다.
하여간 우리는 철학시, 철학수필, 철학소설, 철학희곡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과 철학의 구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같은 바닷물 속에 살고 있다고 하여 포유류에 속하는 고래와 난태생 동물인 상어를 동일시하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논변이 있다. 문학과 철학 사이에는 ‘여전히 높은 베를린 장벽이 가로 놓여 있다’는 것이다.4) 우리는 먼저 이 주장을 검토해 보자.
2. 문학과 철학은 각기 다른 방법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김욱동은 최근에 문학과 철학의 벽이 많이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다.
신역사주의자들이 문학과 역사의 벽을 허물어 버렸다면, 해체주의자들을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문학과 철학의 벽을 허물어 버렸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 중에서도 자크 데리다는 문학과 철학 사이에 놓여 있던 높다란 벽을 허물어뜨리는 데에 그 누구보다도 앞장 선 가장 대표적인 이론가다. 그는 『철학의 주변』에서 ‘철학도 궁극적으로는 문학 장르의 한 갈래에 지나지 않는다’고 아예 못박는다. 신실용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늘 붙어 다니는 리차드 로티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데리다의 이 말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되풀이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두 영역을 엄격히 나누려고 하는 것은 ‘폭력적’ 행위임에 틀림없다.
구조주의 이후 부쩍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텍스트’라는 관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활자 매체로 된 글만이 텍스트가 아니다. 영화도 텍스트요, 만화도 텍스트다. 레슬링에서 일본의 씨름 스모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무희들의 관능적인 스트립쇼도 모두 다 텍스트로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쇠조각이라면 닥치는 대로 다 집어삼킨다는 그 전설적인 동물 불가사리처럼, 텍스트는 기호로 볼 수 있는 문화 현상을 모두 다 자신의 영역으로 삼으려고 한다.
포스트구조주의에 이르러 텍스트의 개념은 이보다 훨씬 더 넓어진다. 기호의 무한한 유희가 만들어 내는 담론이라면 어느 것이나 텍스트의 울타리에 들어간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자체가 바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구조주의에 따르면, 문학과 철학은 텍스트의 용광로 속에서 그 흔적도 없이 하나로 녹아들어 버리게 마련이다.
이렇게 학문과 학문의 경계선이 허물어져 버린 지금 문학과 철학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면 어쩌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은 차라리 나은 편이고, 아마 ‘로고스 중심주의적’이나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비난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학문과 학문 사이에 문화와 문화 사이에 일부러 경계선을 두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한다고 해체주의자들은 말한다. 결국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억압함으로써 자신의 현 상태나 기득권을 계속 지키려는 약삭빠른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욱동은 문학과 철학의 절대적인 차이성을 주장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방법의 측면에서 볼 때 문학은 미토스에 뿌리를 둔다. 더 나아가서 철학은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만, 문학은 ‘철학보다 좀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그는 이 양자의 차이점을‘비타민과 시래기의 차이점’으로 설명한다.
함유하고 있는 성분으로 치자면 비타민 알약이나 시래기국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시들어버린 무청이나 배춧잎과 같은 것을 버리지 않고 말려 두었다가 음식으로 만든 시래기국은 비타민 C가 많아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만약 비타민 C와 시래기국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맛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함유 성분은 서로 똑같을지는 모르지만, 비타민 알약에서는 시래기국에서 맛볼 수 있는 그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별미를 도저히 맛볼 수 없다. 철학이 비타민 알약처럼 삶에 대한 추상적 명제를 다룬다면, 문학은 시래기국처럼 삶에 대한 구체적인 맛을 보여 준다.6)
한 마디로 ‘철학이 논리를 방법으로 삼는다면 문학은 직관을 방법으로 삼는다’는 것이며, 차가운 철학이 머리에 호소한다면 문학은 뜨거운 가슴에 호소한다’는 것이다.7)
물론 김욱동도 사르트르, 카뮈,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들이 그들의 사상을 주로 문학작품을 통해 발표했으며, 우리 나라의 장용학, 최인훈, 이문열과 같은 소설가들이 실존주의적인 작품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엄밀히 따지고 보면, 실존주의는 철학의 적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사생아에 가깝다”고 말한다.8) 실존주의는 진짜 철학이 아니라는 뜻일까.
둘째, 또한 문학과 철학은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서로 다르다고 김욱동은 말한다. 진선미 중에서 철학은 진을 추구하고, 윤리는 선을 추구하고, 문학은 미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김춘수의 『꽃』과 장정일의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김춘수의 [꽃]올 변주하여』를 통해 문학의 탐미성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문학과 철학을 갈라 놓으려는 김욱동의 이상의 두 가지 이유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문학과 철학의 관계 : 문학철학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밝혔다.9) 우선 미토스의 방법올 사용한 철학의 텍스트로는 실존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플라톤의 수많은 대화 편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논리와 직관의 차이도 그리 넓은 것이 아니다. 또한 철학이 진을 추구하고 문학이 미를 추구한다는 발상은 김욱동 스스로 인정한 학문간의 학제적(interdisciplinary), 다학적(multi-disciplinary), 통학적(tansdisciplinary)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10) 그리고 실존주의가 철학의 서자라는 주장도 전혀 설득력이 없다. 우리는 일단 모든 철학 작품을 ― 그것이 아무리 추상적이더라도―실존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욱동이 인정하듯이 문학과 철학은 다같이 ‘삶이란 무엇인가?’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대상은 서로 같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11)
3. 문학과 철학은 ‘평가적’으로 같지만 ‘분류적’으로 다르다
박이문은 김욱동의 사상보다 한 걸음 앞서 있다. 그는 철학적 텍스트의 양상이 ‘정언적’이고 문학적 텍스트의 양상이 ‘개연적’이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문학도 세계와 인간을 보는 우리의 시야를 확장해 준다는 점에서는 철학과 마찬가지로 정보적·지적인 작업이며, 이런 뜻에서 문학도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20세기 초에 탄생한 논리실증주의 사조를 벗어나서 좀더 넓은 의미의 전통적인 철학관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우리가 ‘문학이 탐구하는 것이 가시적으로 진위를 가려낼 수 있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 도덕적 선악의 갈등 문제, 미적 가치, 인류 역사의 의미, 우주 존재의 의미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문학은 철학이 탐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이다.12)
이런 전제 아래 박이문은 문학이 ‘철학적’일 수 있는 세 분야를 제시한다.
첫째는 문학 속의 철학의 경우가 있다. 우리가 문학작품 속에서 인생의 의미, 선악의 문제, 진리의 본질, 영혼과 자아의 문제, 신의 존재 등의 전통적인 철학적 담론을 발견할 수 있는 경우다.
단테의 『신곡』, 밀턴의 『잃어버린 파라다이스』, 셰익스피어의 『햄릿』, 괴테의 『파우스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아누이의 『안티고네』, 사르트르의 『구토』,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등이 여기에 속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철학의 문학적 대치의 경우가 있다. 우리가 문학이라는 형식을 빌려 철학적 주장을 발견하는 경우다. 합리주의자 라이프니치의 형이상학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시도한 볼테르의 『캉디드』, 지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가 양립할 수 없다는 철학적 입장을 한 과학자를 통해 보여 주는 괴테의 『파우스트』, 불타의 생애를 통해 불교의 진리를 전달하려는 헤세의 『시다르타』 등이 여기에 속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문학작품 자체가 철학인 경우다. ‘언어의 기능, 그 의미의 원천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지는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즈 웨이크』, ‘신이 부재한 우주에 대한 의미’를 제기하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20세기 중엽 아르헨티나의 가상적 작가 메나르의 이야기를 담은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나르, 동키호테의 작가』 등이 여기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문학은 철학적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박이문은 ‘평가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분류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세계와 인간의 모든 문제를 깊이 그리고 넓게 생각하게 하는 문학작품, 즉 좋은 작품을 써야 한다’는 평가적인 뜻에서 문학은 철학적이어야 하며, 이런 주장은 이른바 비철학적 문학이 판을 치고 있는 현실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분류적인 뜻에서 문학작품이 철학적이라거나 철학적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문학과 철학이 처음부터 구별된 이상, 문학 텍스트와 철학 텍스트는 서로 독립된 분류적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14)
박이문의 이런 사상은 분명히 그가 1982년에 출관한 『문학 속의 철학』에서 한 걸음 발전한 것이다. 그는 그 책에서 ‘문학이 어떤 대상을 직접 서술한다는 의미에서, 문학은 철학보다도 오히려 과학에 가깝다’고 주장했으며, 이런 뜻에서 그는 ‘문학의 일차성과 철학의 이차성’을 주장했으며, 나는 이미 그의 이런 사상을 앞의 글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문학과 철학의 친척관계를 상당히 인정하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굉장히 혼란스럽다.
첫째, 박이문은 아직도 문학철학과 철학문학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 ‘철학적 문학’이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두 분야를 전부 담고 있다. 만약 우리가 그의 철학적 문학의 세 가지 기능을 받아들인다면, 첫번째는 철학적 비평이라는 순수한 문학의 한 분야에 속할 것이며, 두 번째는 문학철학에 속할 것이며, 세 번째는 철학문학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더욱 좁혀서 말한다면, 첫번째와 두 번째는 고유한 문학철학의 영역이지만, 세 번째는 철학문학의 영역이라고 할 수도 있다.
둘째, 문학과 철학이 평가적으로 같지만 분류적으로 다르다는 박이문의 주장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는 일반적으로 문학과 철학은 서로 분리되어 왔으며, 그렇기 때문에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뜻인 듯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우선 사실과 당위의 관계에 얽힌 복잡한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그 내용이 극히 공허하다. 그 주장은 극히 ‘비정보적’이다. 더 나아가서, 만약 우리가 그가 주장하는 철학적 문학의 세 번째 기능을 인정한다면, 그는 여기에 속하는 작품들에 대해서도 평가적·분류적 차이점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셋째, 하여간 박이문은 결과적으로 철학미술, 철학조각, 철학판화, 철학비디오, 철학문학의 가능성을 인정한 셈이다.
나는 다음 장에서 철학문학을 철학수필에 한정시켜 토론하겠다. 일반적으로 문학의 다른 어느 장르보다 우리 나라의 수필가들은 ‘철학’ 혹은 ‘철학적’이라는 어휘에 대하여 거의 본능적인 불쾌감, 혐오감, 이질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 철학수필, 왜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박재식은 철학수필을 ‘철학적인 내용을 가진 수필’이라고 규정하면서, ‘주로 인간이나 사물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된(내가 지금까지 발표한 글들과 비슷한?) 대부분의 ‘철학적 에세이’나 ‘수상’은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첫째, 이런 글들은 ‘지극히 논리적인 배려에만 충실한 건조한 문장’으로 되어 있어서 ‘문장에 배어 있는 촉촉한 느낌에서 오는 미적 감홍을 맛으로 읽히우는 언어예술’이 아니다.
둘째, 이런 글들은 ‘관념적, 보편적으로 표착된 인간을 제재나 주제의 패턴으로 삼는 것이 보통인데 대해, 문학은 살아 있는 그대로의 인간, 특정한 환경 속에 살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 특정한 환경 속에 살고 있는 피가 통하는 인간이 대상이 된다.’16)
결국 박재식은 ‘수필이 다루는 대상에서 철학적인 소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철학수필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없지 않다.”고 주장하며, 만약 철학수필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문학적 전문성의 수필에 대응하는 상대적 의미의 잠정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17)
정진권도 철학수필을 ‘철학적 사색을 내용으로 하는 수필’로 정의하면서, 철학수필의 두 가지 특징을 ‘독자의 정서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보다 더 논리 쪽에 호소한다’는 점과 그 주제와 소재가 사회적이라는 점을 든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한흑구의 『죽음』을 예로 들면서 개인수필도 철학수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일반수필과 철학수필의 차이는 정서와 논리의 차이뿐이라는 뜻이다.(그렇다면 왜 그는 처음에 철학수필의 조건으로 사회수필을 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여간 정진권의 결론은 극히 소극적이다.
나는 철학수필을 써 보자는 데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서정적 수필을 경시한다거나 수필이 논설문이 되어도 좋다는 뜻을 함축한 것이라면 나는 거기에 동조할 수 없다.
김시헌은 왜 서양에서는 정서를 완전히 무시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학문에 대하여』나 『진리에 대하여』 등의 글이 철학이 아니라 문학으로 인정되고 있느냐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아마도 이런 글이 주는 감동은 일반수필이 주는 ‘감성적인 감동’이 아니라 ‘철학적인 감동’일 것이라고 시사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철학수필이 ‘문학에저 촌수가 멀어지지 않으려면 ‘최소한의 상황 제시’를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철학수필에서 상황 제시가 없는 글은 딱딱하고 재미가 없다. 실제의 생활에서도, 구체적인 체험에서 얻은 철학은 평생을 두고 오래 남지만, 책에서 읽은 철학적인 지식은 그때뿐 곧 잊어진다. 그와 같이 중수필에서의 상황(예화) 제시는 철학의 씨앗을 잉태하는 모태 역할을 한다. 상황을 통해서 철학을 얻었을 때 그것은 가슴에도 울리고 바닥 깊은 곳에 남기도 한다.19)
이정림은 오늘날 수필계에서 수필과 에세이를 구분하려는 세도에 대해 ‘수필이라는 명칭은 에세이의 역어(譯語)에 지나지 않으며, 개념상의 이질성은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전제 아래 내가 ‘철학적 에세이’나 ‘수상’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들도 분명히 수필이며, “수필 중에서도 중수필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의 수필은 ‘비문학 수필’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20)
물론 이정림의 이 지적은 내가 나 스스로 제시한 수필관에 걸맞는 수필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충고가 되겠다. 그렇다고 해도 ‘비문학 수필’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수필이 이미 문학이라면, 앞의 표현은 바로 ‘비문학적 문학’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비문학 수필’이란 중수필로 대조되는 ‘비정서적 수필’ 혹은 ‘논리적 수필’을 말한다. 그리고 그의 이런 논변은 서정 혹은 감성이 바로 문학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철학수필의 가능성을 반대하거나 의심하는 사람들의 논거는 한 마디로 ‘감성=문학’이라는 도식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박재식이 다같이 산을 예찬한 글이면서도 변해명의 『산처럼 사노라면』은 수필이지만, 안병욱의 『산』은 철학일 뿐이라고 규정하고, 정진권이 논설문이 바로 수필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하고, 김시헌이 문학수필도 수필이라면 ‘정서의 표현’을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면 ‘감성 = 문학’, ‘정서 = 문학’이라는 도식은 잘못된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는 진리가 아니라고 믿는다. 모든 문학이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지성=문학’, ‘논리=문학’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문학이 그리고 수필이 감성적이고 정서적일 뿐만 아니라 지성적이고 논리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우리는 ‘단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이라는 제한형용사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과연 이런 제한형용사를 사용할 수 있겠는가.
김시헌은 앞의 글에서 왜 우리 나라에서는 절대로 수필로 인정될 수 없는 글들이 서양에서는 버젓이 문학의 장르로 인정받고 있느냐는 문제를 제기했다. 왜 서양에서는 정서적인 표현이 전혀 없고, 난해하고, 상황 제시가 생략되고, 개별성이 완전히 결여된 글까지 수필로 인정하느냐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제기한 이 문제에 대하여 답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시 상황 제시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이 문제를 외면하고 말았다.
나는 문학이 곧 감동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감동은 정서적일 수도 있고 지성적일 수도 있다. 예를 들자.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파스칼)
·신은 죽었다.(니체)
·우리는 결혼해도 후회할 것이며 결혼하지 않아도 후회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철학이란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다.(플라톤)
·한 사람의 이익은 다른 사람의 손해다.(몽테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서양 속담)
·시작이 반이다.(한국 속담)
·무병단명(無病短命)하고 일병장수(一病長壽)한다.(중국 속담)
·죽음보다 명예를 택하라.(인도 속담)
·도(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다. (공자)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상도(常道)가 아니다.(노자)
·수필은 역설이다.(필자)
·아내란 젊은 남자에게는 애인이요, 중년 남자에게는 동반자요, 늙은 남자에게는 간호사다.(프랜시스 베이컨)
·아내와 자녀를 가진 남자는 행운의 인질이 된 사람이다. (프랜시스 베이컨)21)
이런 표현들은 정서적이기보다는 논리적이고, 개별적이기보다는 보편적이고, 구체적인 상황 제시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딱딱하고 재미가 없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어느 경우에는 훌륭한 서정수필보다 더욱 진한 감동을―그것도 잠시가 아니라 정말 오랫동안―줄 수 있다.
문학은 그리고 수필은 감성과 지성의 두 날개를 가지고 있다.
(1) 황필호 『수필과 철학』, 『현대수필』 1994년 여름호.
(2) 황필호 『문학철학 산책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집문당, 1996, PP. 130 ~154.
(3) 황필호 『수필철학, 왜 지금 필요한가』, 『수필과 비평』, l996년 7∼8월호, PP. 175∼185.
(4) 김욱동 『철학은 문학인가』, 『철학과 현실』 l996년 여름호 PP. 57.
(5) 같은 글 PP. 55~56. (6) 같은 글, PP. 60.
(7) 같은 글 PP. 60. (8) 같은 글, PP. 61.
(9) 황필호 『문학철학 산책』 집문당, 1996년 PP. I42~146.
(10) 김욱동 앞의 글 PP. 54.
(11) 같은 글 PP. 59.
(12) 박이문 『문학은 철학적이어야 하는가』, 『철학과 현실』 1996년 여름호. PP. 49.
(13) 같은 글 PP. 53.
(14) 같은 글 PP. 52.
(15) 황필호 앞의 책 PP. 146~149.
(16) 박재식 『철학수필의 문학성』, 『수필과 비평』 제24호, l996년 7~8월호, PP. l67.
(17) 같은 글 PP. 167.
(18) 정진권 『철학수필에 관하여 : 한흑구 선생의 글을 생각하며』, 『수필과 비평』 제24호, l996년 7~8월호, PP. 174.
(19) 김시헌 『철학수필과 상황 제시』 같은 책 PP. l62.
(20) 이정림 『수필에 접근한 철학자의 변신』, 『수필공원』 1994년 봄호 PP. 99.
(2l)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뜻에서? 행복하다는 뜻에서? 그렇지 않으면, 위대한 일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뜻에서? 놀랍게도 베이컨은 세 번째 의미로 이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그의 다음 문장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분명히 지금까지 역사상에 나타난 최고의 업적들과 국민을 위한 위대한 일들은 미혼자나 자녀가 없는 사람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Francis Bacon, The Essays or Counsels, Civil and Moral, Mount Vermon, New York, PP.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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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매화 사랑
우찬규
매화를 만나러 전라선 열차에 오른다. 천리 길 아득해도 도착은 삽시간이다. 옛 그림에 그려진 '심매행(尋梅行)'은 느려터진 미학이다. 견마잡이를 앞세워 떡 하니 나귀에 올라탄 선비는 사방 진풍경을 다 챙길 요량이다. 게다가 술동이를 멘 하인이 뒤따르니 선비의 꽃구경은 필경 갈지자가 되리라. 이에 비해 철마를 타고 달리는 한일자 남행길은 살풍경하다. 매화에 허기진 마음이 채신머리없이 급행을 재촉한다. 하늘은 짙푸른데 섬진강은 서편제 가락처럼 흘러간다. 강가에 우거진 대숲이 바람에 일렁이는가 싶더니 우르르 달려드는 매화 향기. 코를 냅다 벌름거리며 들이마신다. 그러다 금세 겸연쩍어진다. 이건 아니다 싶은 것이다. 이런 조급함으로 문향(聞香)이 되겠는가.
문득 퇴계 선생의 매화 사랑 앞에 부끄러워진다. 스스로 털어놓기를 '혹애한다' 하였으니 선생이 읊조린 매화음(梅花吟)이 100수가 넘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 시들이 하나같이 선생의 성품인 양 원만한데다 삿됨이 없다. 꽃잎이 아래로 드리운 수양매를 보고 지은 시는 이렇다. '한 송이가 등돌려도 의심스런 일이거늘/어쩌자 드레드레 거꾸로만 피었는고/이러니 내 어쩌랴, 꽃 아래 와 섰나니/고개 들어야 송이송이 맘을 보여 주는구나'(손종섭 번역). 선생은 앵돌아진 여인의 마음을 타박하지 않는다. 먼저 다가가 살며시 다독인다. 모든 목숨붙이를 연민의 눈으로 본 선생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이 이 시에도 살아있다. 선생에게는 가까이 두고 어루만진 매화분이 있었다. 어쩌다 거처가 탁해지기라도 하면 매화분을 먼저 옮겨 씻기는가 하면 신병이 깊어지자 각방을 썼다는 일화도 있다. 모두 선생의 개결한 성정을 일러주는 사례이겠지만, 그 너머 또 다른 선생의 진정이 숨어 있을 것으로 믿는 사람도 있다.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난 두향 얘기다.
관기였던 두향은 선생을 사모하여 가까이 모시길 자청했다. 처신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한 어른인지라 두향의 애간장은 녹았을 것이다. 마침내 선생의 마음을 얻은 것은 조선 천지를 뒤져 기품 넘치는 매화 한 그루를 찾아낸 뒤였다. 두향은 그 매화를 선생에게 바쳤고, 선생은 단양 시절 동안 동헌에 심어놓고 애완했다. 물론 두향에게도 곁을 주었다고 한다. 두향의 매화는 선생이 새 임지로 떠나면서 도산으로 옮겨져 명맥을 이었다. 단양에 홀로 남았던 두향은 수년 뒤 선생의 부음을 듣고 자진했다. 죽음에 얽힌 설이 분분하지만 나는 앉은 채로 숨을 딱 멈춰버렸다는 두향이 가장 그답다고 여긴다.
두향의 묘는 지금 단양의 구담봉 맞은편 산자락에 있다. 그 묘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될 뻔한 적이 있었다. 퇴계 후손이자 국학자인 고 이가원 선생이 생전에 두향 묘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분이 해준 말씀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수몰을 앞두고 고심하던 어느 날, 그분 꿈속에 두향이 나타났다. 두향은 "나를 그대로 두시오. 물에 잠겨서라도 이곳에 있겠소"라고 했다는 것이다. 곡절 끝에 지금 자리로 이장되긴 했으나 두향의 일편단심은 꿈속에서도 단호했다. 퇴계 선생이 임종을 앞두고 남긴 말은 알다시피 "저 매화에 물 줘라"이다. 나는 그 말에서 선생의 심중에 남은 두향의 야윈 모습을 본다.
지난해 가을 나는 매화 전문가에게서 운 좋게도 도산 매화의 지손(支孫)을 몇 주 분양받았다. 가지도 줄기도 꽃받침도 모두 푸른 녹악매다. 집 담장 밑에 고이 심어 모셨다. 내년부터는 남행열차에 성급히 몸을 싣지 않아도 되리라. 느긋해진 마음으로 꽃이 피면 꽃 아래서 매화음(梅花飮)을 펼쳐도 좋겠다. 흥이 오르면 내 좋아하는 매화 시구를 읊어 보기로 작정해 둔다. 퇴계 선생과 두향이 명계에서나마 웃어주시면 좋겠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前身應是明月 幾生修到梅花)'.
우찬규 학고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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