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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집을 지으리'라는 새
정 목 일
티벳의 전설에는 ` 내일이면 집을 지으리'라는 새가 있다. 밤이 되면 히말라야산에서 몰아치는 눈보라와 세찬 바람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는 새는 사람들의 집 처마기둥에 몸을 의지한 채 울부짖는다.
" 아, 내일이면 반드시 집을 지으리"
뼈속으로 파고드는 추위에 떨면서 집을 갖지 못한 처지를 자책하면서 슬피 울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바람을 막아줄 집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밤을 지새웠다. 한 밤을 지내는 일이 가혹한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날이 새고 히말라야산 위로 해가 떠오르면 얼었던 몸이 풀리고, 따사로운 햇살이 퍼졌다. 새는 어제 저녁에 겪었던 가혹한 추위와 고통도 잊어버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부르며 지냈다. 낮은 금새 지나가고, 어둠이 내리면 추위는 어김없이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그러면 새는 온 몸을 부르르 떨면서 절규하곤 했다.
"아, 내일이면 반드시 집을 지으리라"
낮이면 햇빛의 따사로움에 밤의 고통을 망각해버리던 새는 평생을 `내일이면 집을 지으리라'고 울부짖으며 살았을 뿐 집을 짓지 않았다.
집은 자신이 평생을 통하여 추구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꿈, 희망을 뜻하기도 한다. 꿈을 이루려면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데도 힘겨운 일을 하려 들지 않는다. '내일'이란 도피처가 있기에 오늘만은 좀 편안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의 유혹을 받는다. `내일'이란 말은 항상 꿈과 달
콤함을 주는 천사다. 오늘 비록 고단하고 별 볼 일 없는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내일이면 신이 행운의 선물을 가져오리라는 기대 속에 살아간다. 나 또한 `내일이면 집을 지으리'라는 새가 아니었던가.
외국에 나갈 때마다 자신에게 명세 하던 것이 있었다.
" 아, 귀국하는 즉시 외국어를 공부하리라"
여행하면서 벙어리 신세를 면치 못했던 불편함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굳게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귀국하는 즉시 외국어 공부는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 `내일'이 있다는 위안 때문에 굳게 다짐했던 명세는 마음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우리 나라에선 외국어를 사용하지 않기에, 낮이면 밤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내일이면 집을 지으리'라는 새가 돼버렸다. 한 두 번만이 아니었다. 수십 번도 넘게 외국에 갈 적마다 명세하지 않은 적이 없건만, 어째서 나는 번번이 '내일이면 집을 지으리'라는 새가 되고 마는 걸까.
일본의 어느 퇴임 교장의 얘기이다.
교육자로 존경을 받으며 퇴임한 교장이 어느 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평생을 통해 얻은 발견, 진실, 의미, 가치가 있었던가? 이런 질문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일생이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실패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교육자로서 긍지를 지니고 살아온 보람된 삶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생을 성찰해 보니 자신만의 빛깔, 의미, 가치가 없음을 알았다. 일생이 허무하다는 걸 깨달았다. 자
신의 일생을 냉철하게 분석해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는 사람의 일생을 70세로 보고 24시간으로 환산해 자신의 남은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아, 내 인생 시계는 지금 몇 시인가?'
퇴임교장에게 남겨진 시간은 불과 2시간 남짓뿐이었다. 이것은 놀라운 자각이었다. 새로운 삶의 대발견이었다. 지금까지 인생시계가 몇 시인지도 까마득하게 모르고 지냈다는 것이 이상할 뿐이었다. 왜 이런 생각을 일찍부터 해보지 못했을까.
" 아, 내 22시간은 어디로 흘러간 것일까?"
그의 입에선 낙망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귀에선 인생시계의 초침소리가 째각째각 들려오고 있었다. 남은 2시간의 일부가 흘러가고 있었다. 촛불은 어느새 바닥에 닿고 마지막 심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한 방울도 아까운 촛농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
다. 참다운 사랑, 진실, 가치, 의미도 없이 촛불 하나가 꺼지려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 촛불이 꺼지면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
뜬눈으로 밤을 샌 퇴임교장은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났다. 비를 들고 자신이 살고 있는 골목안을 깨끗이 쓸었다. 한 길에 나가 등교하는 어린이들에게 교통지도를 했다. 동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독서지도도 하고, 노인학교에 봉사원으로 일했다. 남은 시간이 2시간밖에
없었다.
계절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제 몇 번 맞을까 모를 계절이었다. 대수롭게 보던 꽃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지나가는 나비와 바람을 보며 말을 걸고 마음을 나눴다. 마음을 교감하는 순간,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남은 2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는 방법과 장치로써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22시간을 무의미하게 놓쳐버리고 말았지만 남은 2시간만은 깨어있는 의식 속에서 인생의 가치를 담아두려 했다. 순간의 발견과 진실을 '인생'이라는 일기장에 담아두고 싶었다. 기록만이 망
각과 허무를 극복하는 길임을 깨달았다.
그의 일기는 성실과 발견과 깨달음으로 채워졌다. 꽃의 표정과 말을 담았다. 바람의 말과 교감을 담았다.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로소 그는 자각의 눈을 뜬것이다.
5년 후 일기문을 출판하면서 머리말에 적었다. ' 24시간 중 22시간이 흐른 후, 남은 2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한 끝에 일기를 쓰게 되었다. 여기에 쓴 것이야말로 내 일생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발견, 사랑, 의미, 가치였다'.-고.
새해가 되면 나도 일기쓰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두 달을 넘기지 못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 했던가. `내년부터 쓰면 되지'하는 안일한 유혹이 은근히 내 마음을 꾀는 것이었다.
언제나 나는 '내일이면 집을 지으리'라는 새에 불과했다. 후회의 연속, 좌절의 연속인데도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고 편안함을 찾았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내일을 신봉하고 꿈을 쫓았으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고단하고 무료하고 처참한 오늘을 경원하면서 언제나 찬란한 미래가 다가올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인간은 오로지 오늘을 살 뿐인데도 나는 오늘을 신뢰하지 않았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꿈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거기에 이르는 사닥다리를 만들어 한 계단씩 땀흘려 올라가지 않으면 닿을 수 없다는 걸 몰랐다. 그냥 행운의 신이 기회를 주리라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떤 계획도 노력도 없이 시간을 소비해버린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제 내 가슴속에 살고 있는 '내일이면 집을 지으리'라는 새를 쫓아내야겠다. 내 인생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내 인생 시계는 지금 몇 시인가?"
남은 시간을 셈해보면서 추위와 고통 속에 잠들지 못하고 울부짖는 '내일이면 집을 지으리'라는 새를 생각한다. 내일을 위해 오늘 당장 집을 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왜 모를까.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기 전에 나는 온전한 집을 반드시 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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