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꽃 / 도월화
그날의 신부는 하얀 백합꽃을 빼닮았다. 나는 속으로 어쩌면 신부가 엄마하고 똑 같네 하며 놀랐다. 우리 딸이 디자인해서 지은거야. 신부의 어머니, P선생님이 백합처럼 맑게 웃으며, 따님이 두 달간 재봉을 배워, 웨딩드레스를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신부의 꿈과 정성이 담뿍 담긴 순백의 드레스는 한 송이 흰 백합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신부가 디자이너인가 할 테지만 사실은 신진 변호사님이다. 신랑은 또 사법연수원에서 만난 갓 태어난 검사님이시고. 풋풋한 백합화 같은 한 쌍의 신혼 부부, 바로 P선생님의 고명따님과 새 사위님이니, 얼마나 대견스러울까.
P선생님은 늘 우리 딸이 말이야, 우리 딸이 말 이예요. 하며 즐겨 자랑하곤 했다. 그렇게 따님 얘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나는 예식장에서 처음 봐도 처음 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어느 분이 오늘 신부가 유치원 다닐 때, 그 어린 것이 엄마 사무실에 놀러 와서 우리 어머니는 몸이 약하시니 많이들 도와주세요 했다고 회상하자, 함께 자리했던 이들이 모두 그 엄마에 그 딸이라며 폭소를 터뜨린다. 서로 다정한 모습이 미풍에 얼굴 비비며 나부끼는 백합 송이들 같다고나 할까.
딸 자랑 뿐만이 아니다. 우리 어머님이, 남편이, 아들이,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말만 시작하면 추켜세우는데 이력이 나신 분이다. 아들 딸 남매를 두신 P선생은 년 전에 며느님을 얻어, 위로 시어머님 모시고 삼대가 한 집에서 산다.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분가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젊은 며느님의 생각도 훌륭하지만, 아마도 그 댁 가풍이 그만한 감화력이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방금 나 우리 며느리가 끓여준 밥 먹었어."
어떤 때 통화하게 되면 며느님이 지은 점심 드신 것까지 자랑하신다. 그 순간 나는 P선생님의 자랑은 왜 듣는 이들의 귀에 거부감을 주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것은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 아니겠는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의 '네 이웃'이란 대부분의 경우 가족이라고 한다. 주위의 좋은 면만 보는 것이 너무 외골수 아니신가 의아할 때가 있을 정도이지만, 어딘가 백합화처럼 감미로운 향내를 머금어, 싱그러운 기운을 전해주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지금 대학생인 둘째가 초등학생일 때 P선생님과 천주교회에 간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집 가까이에 있는, P선생이 나가시는 사무실의 일을 도우러 갔다. 일과 후 함께 그 근처의 여의도 성당으로 가니, 지역 금융인들을 위한 미사 집전을 하러 추기경님이 오셨다. 마침 그날 우리 작은애가 흰 백합 빛깔 제의의 추기경님 옆에서, 전례를 보조하는 복사를 섰다. 새하얀 복사 옷을 입은 막내가 예쁘다고 하신 선생님은 두고두고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분들을 붙들고, 내가 몸 둘 바를 몰라 할 정도로 몇 번 이고 아이를 잘 키운다고 칭찬하는 것이었다. 나는 겸연쩍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늘 '얼마나 감사한지..' '만나서 행복했어.' 라는 말을 들려주는 P선생님은 나보다 10년 남짓 앞선 대학 선배이시다. 자녀가 부모 뜻을 잘 따라주니 감사하고, 후배가 사는 모습이 보기 좋으니 감사하고, 반가운 이를 만나서 감사하고. 그 풍요로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감사는 하얀 백합꽃처럼 깨끗한 마음 상태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 떨기 순결한 흰백합화를 떠올리면 백합꽃은 창조주께서 즐겨 받으시는 것은 겸손과 감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도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이 몸에 배여 있는 선배님의 백합처럼 조촐한 마음을 닮고 싶다.
이번 달에 대학 졸업식을 하게 되는 우리 큰 애가 연초부터 직장에 첫 출근을 했다. 감사 기도가 절로 나오면서도, 첫아이라서 언제나 첫 느낌이 각별하다. 설렘, 불안, 신기함...... 약간은 혼미한 감정 속에서 기쁨과 감사를 골라내어 내 마음의 보석함에 정결하게 담아두려 한다. P선배님을 닮아가서 나도 머지않아 백합꽃 같은 며느리를 보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지난 주 P선배의 따님 결혼식에 갔을 때, 나는 신부 모녀의 밝고 맑은 미소에서 백합꽃을 연상했다. 신부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신 주례 선생님은 누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평소 내가 먼저 남을 알아주고 배려해주지 못한 점은 없는가 돌아보며 살아가라고 당부했다. 언제나 남의 장점이 눈에 먼저 들어와, 칭찬하고 격려해주는 P선생님의 따님이니 어련할까. 흰백합화야말로 저 산 밑의 가시밭에까지 피어나,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주지 않던가.
소망과 기원이 담긴 손길로 옷감을 마르고, 한 땀 한 땀 바느질하여 입고나선 그날의 신부는 보이지 않는 정성이 어리어, 어느 유명 디자이너의 웨딩드레스보다 빛났다. 백합화처럼 아름다웠다. 백합은 꽃잎이 왕관처럼 기품 있으면서도 살짝 고개 숙여 겸손한 마음을 드러내며 깨끗하고 환하게 피어난다. 보는 이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도 불어오는 산들 바람에 그윽한 향기를 전한다. 들에 핀 흰백합화를 보아라. 요란한 빛깔로 과시하려 들지 않고, 순수 그 자체의 모습이 되어, 찬미와 감사의 몸짓으로 서있지 않는가.
2005. 2.
계간[창작 수필] 2005. 가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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