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꽃
청호
십이월 말에 인사동을 지나다 가게 앞에 뚝새풀 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겨울에도 양지쪽에 파릇파릇 살아 있어 생명력이 몹시 강한 풀이다. 마당에 한 번 나면 이듬해 더 성하게 번져 없애기가 어렵다. 잡초를 심어서라도 살아 있는 잎을 보려고 하던 서울특별시에서 본 특별한 구경거리였다.
요즈음에는 비닐하우스로 계절이 없이 꽃이나 채소를 볼 수 있다지만 언 땅에 새싹이 나올 때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더구나 꽃이 피어 있으면 앉아서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재배를 하여 보는 것이 아닌 자생력에 마음이 가는 것이다. 그래서 한겨울에도 양지쪽에 살아 있어 잔디밭에서는 잡초가 되는 개미자리를 화초인 양 본다.
봄이 되어 꽃을 기다리면 옛 어른들의 말씀이 떠오른다. 봉오리를 맺은 후 오백 번을 제석천에게 가서 “오늘 피어도 좋을까요?”라며 묻는다고 한다. 그토록 어렵게 피기에 함부로 꺾어서는 안 되고, 꺾었으면 오래오래 두고 보아야 된다고 하셨다.
날씨와 식물의 관계가 깊고, 살아내는 노력이 그토록 어렵다는 뜻이다. 식물에게 꽃이란, 열매를 만들기 위하여 여태껏 준비한 자신을 세상에 비로소 드러내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이다.
어느 해 봄, 목련이 만개했다가 잠시 내린 흰 눈으로 다 지고 말았다. 제석천에게 오백 번을 묻고 핀 꽃이라지만 꽃샘추위도 끝난 시절에 갑자기 변한 날씨를 감당할 수는 없다. 서로 좋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나 심사숙고한 일이 생각지도 않은 어려움을 만날 때, 나는 한창이었던 봄에 눈으로 못다 핀 목련이 종종 생각난다. 이상기온에 피기도 하는 가을 진달래나 개나리와 냉해로 지는 꽃을 보며 나 자신을 생각해보았다. 나는 어떤 꽃일까?
따사로운 햇빛에 마치 잎도 없이 꽃부터 나오는 봄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른 봄에 일찍 핀다고 알려진 매화나 복수초보다 먼저, 맨땅에 잎도 없이 쏙 나와서 피는 노루귀가 있다. 적당히 숨기거나 가만히 기다릴 줄을 모르는 내 모습을 보는 기분이다. 사람을 사귈 때에도 손해나 이익을 그다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마음을 드러내는 편이다.
또, 4월에 피는 앵초를 보면 뒷심이 없는 내 꼴을 보는 것 같다. 땅바닥에 깔린 잎 사이로 올라온 꽃대에 너무 많은 꽃을 피워 제 무게를 못 이겨 꼭 쓰러진다. 초여름이면 벌써 지쳤는지 잎이 말라서 내년까지 죽은 듯 자는 꽃이다. 나와 비슷하다고 친한 스님에게 말하였더니 자신을 잘 안다며 몹시 웃었다. 힘의 안배를 제대로 못하고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다가 한낮이 되면 지치는 나와 꼭 같다고 하였다. 나는 지구력이 없어 처음에는 열심히 하다가 제풀에 지친 일이 더러 있었다. 어른들은 지켜보며 걱정을 하셨고, 무엇보다 스스로 끈기 없음에 실망스러웠다.
앵초가 자라는 것을 보며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자면서 더욱 실해진 뿌리로 이듬해에는 풍성한 잎과 꽃을 피웠다. 사람이나 꽃이나 기질이 저마다 다른 것을 알았다.
추운 지방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남자의 미라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목에는 교살된 흔적과 뱃속에 곡물이 남아 있었는데 치아의 배열로 보아 젊은 남자가 웃으며 죽은 것이라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봄을 기다리던 고대인이 자연에 바친 제물이며, 본인의 희생으로 봄이 올 것을 행복해하는 웃음이라고 추정하였다. 그 남자 미라가 제물로 바쳐지던 해는 봄이 몹시 늦었나보다. 아무리 둘러봐도 먹을 것이 없던 사람들에게 봄이 온다는 것은 희망이며 봄은 생명이었을 것이다.
미라 사진을 본 후, 봄꽃은 단순히 계절이 와서 피는 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다시는 소생하지 못할 것 같은 몸이나 마음의 긴 겨울에 따뜻해질 것을 알려주는, 우주의 귀띔이며 자연의 위로였다.
나는 땅속 얼음 사이로 피는 봄꽃을 사랑한다. 옛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봄과 함께 또 한 해를 살 것이다. 갑작스러운 꽃샘추위에 꽃잎이 얼어도 다시 햇볕을 받아 살아나는 봄꽃을 자화상으로 삼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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