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錯覺) / 김현자
며칠 전 고종사촌동생이 전화로 던진 말 한마디는 내 마음을 적지 않게 흔들어 놓았다. 몇 마디 문안인사가 오간 후 그가 불쑥 말했다. “누님, 그 때 보니까 확 늙으셨대요.”. “언제 날 보았는데?”. “한 이년 전쯤이요.”. “그래? 지금은 더 많이 늙었어.”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지만 전화기를 내려놓는 내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나이 든 사람보고 늙어 보인다고 말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왜 이리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일까. 그 동안 나는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네요.’ ‘안 늙는 비결이 뭐예요?’ 등의 인사말을 많이 들어왔었다. 심지어 20년 전과 똑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게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내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라는 일종의 착각 속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65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발급되는 경로우대증을 갖고 처음 지하철에 내려갈 때의 묘한 기분을 잊지 못한다. “당신이 진짜 65세가 넘었오.?” 라고 역무원이 물으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에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이다. 약간은 창피한 마음도 있었고. 매표원은 노인증 만 힐끗 쳐다보고 흰 승차권 한 장을 내밀었다.
나 뿐 아니라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고 싶다, 늙어 보이지 않으면 좋겠다, 적어도 추하게는 늙지 않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염원일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화장술로 젊게 보이도록 외모를 가꾸고, 심지어 성형수술까지 서슴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실제 자기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모녀가 자매로 보이는 것은 흔한 일이고 30대로 보이는 주부가 손자를 본 할머니라는 사실에 놀란 경우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얼마 전 한 모임에 갔더니 쪽지 한 장이 나돌고 있었다. 읽는 사람마다 입가에 묘한 웃음이 스쳐 가는 것을 보고 나는 아, 또 그 일본어 문구(文句))로구나 하고 짐작했다. “노인의 자위(自慰)”라는 제목이 붙은 이 정체불명의 시가 요즘 노인들간에 은근히 나돌고 있음을 안다. 일어로 된 것을 보면 일본에서 건너온 것 같기도 한데 그 출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40, 50은 꽃으로 말하면 봉우리/ 60은 한창 피어날 때,/ 7, 80은 인생의 꽃,/ 90에 데리러 오면 100까지 기다리라고 쫓아버리고/ 100세가 되어 다시 오면/ 귀가 어두워 못 듣는다고 딴전을 피우라.”
늙음을 받아드리지 않으려는 노인들의 몸부림이 처연하게 느껴진다. 얼마나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으면 백세에 가는 것도 마다할까. 자위보다는 자기연민의 기분이 앞선다. 하긴 7, 80대의 노인이 나는 인생의 꽃이다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이 늙음을 비관하고 사는 것보다는 백 번 나을 수는 있을것이다.
그러나 과연 오래 사는 것만이 능사일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장수(長壽)는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끝까지 유지하고 적어도 스스로 삶을 음미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100세의 노모와 75세의 아들이 만나는 광경은 실로 애절한 것이었지만 화면에 비치는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쇠잔할 때로 쇠잔한 모습이었다. 오직 아들을 만나야겠다는 일념이 생명의 끈을 지탱해 주었을 뿐 적극적으로 살아온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오늘의 장수를 누리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수명이 이렇게까지 연장될 것을 알지 못했고 따라서 대비도 하지 못한 채 길고 긴 노년을 그저 살고 있는 것이리라.
같은 노년을 살아도 사는 모양은 제각각인 것 같다. 나의 친지 중에는 5년 째 양쪽 코에 호스를 끼고 음식을 공급받으며 식물인간 상태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이가 있다. 가족들이 호스를 빼주기를 바라지만 병원에서는 절대로 중단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대과학의 횡포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가하면 100세를 넘기고서도 건강을 유지하며 보람 있게 사는 이도 있다. 내가 아는 한 미국여성은 100세가 넘은 지금도 NGO대표로 유엔에 나가고 있어 주위의 사람을 놀라게 하고 있다. 100세에 찍었다는 그녀의 사진은 50대의 총기와 이지적인 인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런 경우는 청장년기의 활동이 노년에까지 자연스럽게 연장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노년을 위한 준비는 이미 젊었을 때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나도 이왕이면 활기 있게 살다가 곱게 늙었으면 하는 소원을 갖고 살아왔다. 그런 기대가 나로 하여금 근거 없이 다른 사람보다 더디 늙을 것이다라는 착각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사람이 던진 정직한 말 한마디가 그 환상과 착각에서 깨어나게 했다. 나는 열심히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는 남편에게로 갔다. “글세, 나보고 확 늙었대요.” 요즘 청력이 좀 떨어진 그가 못 들었는지 반응이 없다. 조금 더 큰 소리로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그제야 나를 돌아다보며 그가 말했다. “누가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은 아직도 사십대로 보여.” “아무리 그럴까...” 라고 하면서도 싫지는 않다.
하기야 남편이 젊다고 보아주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매일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정신을 집중해서 무엇인가 연구하고 글을 쓰고 인터넷으로 제자교수들과 학문적 대화를 하는데 여념이 없는 남편이야말로 자기가 아직도 60세쯤으로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2001.6)
(등단작)
김현자 수필가
전북 김제 출생(’28). 이리여고 졸업(’45). 이화여대 영문학과 졸업(’49). 미 컬럼비아대 사범대학원 수료(’52). 11, 12대 국회의원. 국제의회연맹(IPU) 제2위원회 부위원장. 3차 유엔세계여성대회 한국수석대표. 대한민국헌정회 부회장(현). 대한 YWCA연합회 명예연합위원(현). 세계 YWCA 실행위원. 한국전문직 여성클럽(BPW) 창립회장. 한국여성정치연맹 총재. 여성가족부 정책자문위원(현). 창작수필문인회 회원(현)......중략. 저서 『풍요한 삶』(’79. YWCA출판부). 『열린 세계를 향하여』(’87. 동화출판부). 『아름다운 만남, 자전적 에세이』(’98. 푸른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2007년세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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