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그 후원을 거닐며
김 현 희
창덕궁은 비원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비 내리는 날, 대학로 근처에 일이 있어 들렀다가 문득 고궁을 산책하고 싶어졌다. 마침 화요일은 경복궁, 창경궁이 정기휴일인지라 별 망설임 없이 창덕궁으로 방향을 정하고 택시를 탔다. 걷기에 적합한 기본요금의 거리지만 비 내리는 날의 어지러운 도로에서 고궁 산책의 설렘을 덜어내고 싶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창덕궁으로 가주세요.”
“창경궁요? 아님 비원이요?”
택시기사의 자연스런 그 말이 익숙하게 들린다. 문득 나는 예전의 역사 강좌 때 들은 설명이 생각났다. 그래서 비원이란 말은 쓰지 말고 우리는 창덕궁으로 불러야한다고 조심스럽게 전해 주었다. 비원(秘苑)이라 함은 일본인이 비밀스런 정원이라고 우리나라를 비하시킨 말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였다. 조금 쑥스러웠지만 돌아온 대답이 나를 흐뭇하게 했다.
“손님 덕분에 오늘 하나 배웠네요. 이제부터 다른 손님들에게도 그렇게 설명을 해야겠어요.”
역시 택시기사는 월드컵을 치른 나라의 서비스 종사자답게 열린 사람이었다. 이런 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나라 관광업계에 한몫을 하는구나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돈화문 앞에서 내렸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 5년)에 정궁(正宮)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이 소실되어 조선 말기에 복구될 때까지 약 300년 간 정궁의 구실을 하였던 곳이다. 서울의 5대궁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궁궐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유일하게 안내자와 함께 관람을 해야 하는 곳이다. 혼자서 느끼는 자유로움은 다소 구속을 받을지언정, 친절한 설명으로 더한층 고궁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내리는 비로 인해 더욱 호젓해진 창덕궁 경내를, 한국어 안내시간에 맞추어 열 명 정도의 인원과 함께 한 시간여 동안의 답사를 시작했다.
먼저 창덕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는 기념비가 우리를 반겼다. 창덕궁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석조건축물 금천교를 지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이며 현재 유일한 청기와 전각으로 남아있는 선정전과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을 둘러보았다. 창덕궁의 인정전-선정전-희정당-대조전의 전각들은 정궁인 경복궁의 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과 그 순서와 기능이 비슷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느낌은 다른 궁들과는 사뭇 다른 전각배치였다. 경복궁은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인데, 전각의 배치는 여러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창덕궁은 산세에 의지하여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인위적인 건축물이 물 흐르듯 자연과 융화되도록 한 배려였나 보다. 그럴 것이다. 우리 또한 주위와 융화하며 물 흐르듯 살아간다는 것, 참으로 쉽고도 어려운 삶의 과제이지 않은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하니, 전각 지붕의 추녀 끝에 자그마한 토기 인형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이들은 잡상(雜像)이라 부르는데, 서유기의 등장인물로서 맨 앞에서부터 삼장법사, 손오공, 사오정 등 10가지 종류를 순서대로 앉혔다. 잡상은 살(煞)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며, 3~11개의 홀수로서 건축물의 위상에 따라 개수가 정해진다고 한다. 음의 성질인 짝수는 귀신의 범접이 수월하여 쉽게 재앙이 따라서인가 보다. 친숙한 고궁 나들이로, 나 자신 잡상을 자주 대해서일까. 재미있는 모습들이 오랜 동안 알아왔던 지인들처럼 정겹기조차 하다.
다음으로 왕과 왕비의 휴식처로 사용되는, 가장 한국적인 정원인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목과 연못, 정자 등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이나 조경사적인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후원이라기보다는 비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이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부르게 하여 마치 궁궐이 아닌 공원이나 동물원쯤으로 인식되게 한 것처럼, 비원도 후원을 격하시켜 부른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그동안 잘못 불러온 비원은 후원, 금원(禁苑)으로 고쳐 불러야 할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후원의 아름다운 부용지는, 네모꼴의 큰 연못으로 그 한가운데에는 동그란 섬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 우주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나의 연못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옛사람들의 지혜와 안목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후원을 거닐며, 몇 백 년 전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은 자신과 조우한다. 이 아름다운 후원을 거닐며, 과연 그 당시 왕과 왕비들은 어떠한 정서와 느낌으로 마주했을까. 특히나 여염집 부부들이 느끼는 감정의 자유스러움에 비해 구속받을 수밖에 없는 그들로서는, 그나마 이곳에서라도 정감 있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또한 지금의 우리가 느끼는 이 고요하고 청정한 마음을 그들도 느꼈을까. 아마 시대는 달라도 희로애락을 느끼는 마음들은 별반 차이가 없으리라. 우리의 고궁 어디가 아름답지 않겠냐마는 창덕궁, 특히 이곳 후원에 오면 아름다움을 넘어선 신비함까지 안겨든다. 안개가 나무 사이로 휘돌고 있는, 비 내리는 날이라 더 그런 것일까.
창덕궁은 어느 계절이나 아름다운 곳이다. 그중 가장 아름답다고 느꼈던 날은 용마루에 눈을 이고 있던, 눈 내리는 정월의 생일날이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생일날 아침,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어머니와 함께했던 창덕궁을 홀로 찾았더니 눈부신 서설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다정스레 다독여 주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나에겐 다른 궁들에 비해 유달리 정겨움으로 남는 궁궐이다.
언젠가 낙엽이 깔리는 깊은 가을, 다시 한 번 찾아오고 싶다. 바스락거리는 낙엽향과 어우러진 궁궐은 또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 한 번 보고 싶다. 그리고 30년 가까이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추가로 개방된 옥류천을 거쳐 애련정으로 이어지는 후원의 비경도 만나보고 싶다. 관람정 연못 위를 정겹게 헤엄치는 원앙과 정자 단청이 어리는 물그림자를 함께 볼 수 있다면 행운 중의 행운이리라. 그리하여 고궁의 깊어가는 가을 향기만큼이나 깊어진 내면의 눈길로 마주서고 싶다. 비원이 아닌 우리의 아름다운 창덕궁에서.
- 2007 <창작수필> 봄호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