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반가사유상
鄭 木 日
간신히 시간을 맞춰 공황에 도착했다. 표를 사고 대기석에 앉으니 마음이 놓인다. 저녁에 참석할 모임이 있어서 차질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무심결에 보니 앞에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 문화재를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 중의 하나인 듯하다. 나는 숨을 고르면서 금동반가사유상(국보 83호)과 마주 하고 있다. 왼 쪽 다리를 오른 쪽 다리 위에 올리고, 오른쪽 팔꿈치를 오른쪽 다리 위에 얹어놓고 기다란 손가락은 얼굴에 닿을 듯 말 듯하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얼굴을 손바닥으로 받친 자세가 아니다. 잠자리가 나뭇가지에 앉을 듯 말 듯한 모습이다. 왼쪽 손은 내려와 왼쪽 다리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가장 편한 자세를 취했건만 흩어짐이 없는 균형의 미(美)를 지녔다. 눈을 밑으로 반쯤 내려깔고 명상의 심연에 빠져있다. 웃는 듯 마는 듯한 미묘한 표정이다. 아기가 잠잘 때 짓는 배냇짓 미소일 듯도 싶다.
금동반가사유상은 고요의 한복판, 심연의 한가운데 앉아있다. 나에게 넌지시 말해준다. 편안하게 앉아라. 나는 금동반가사유상의 자세를 취해 본다. 눈을 내리깔고 숨을 가다듬는다.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한다.
'천천히 마음을 버려라, 존재마저도 버려라.'
금동반가사유상은 영원의 한복판에 앉아 미소를 보내고 있지만 나는 당장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금동반가사유상은 이미 존재와 시간을 버림으로써 영원의 자리에 앉아있지만, 나는 시간과 공간에 얽매여 있을 뿐이다. 금동반가사유상은 영원을 안고 있지만, 나는 순간을 호흡하고 있다.
금동반가사유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질문을 던져본다.
'깨달음이란 진리의 발견인가?'
'초월인가?'
'무상 무념인가.'
묵묵 부답의 미소를 띨 뿐이다. 깨달음은 발견, 초월, 무상 무념의 경지가 아닌 듯하다. 깨달음은 얻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 그 자체가 되는 일이 아닐까. 표정엔 침묵의 꽃이 피어나고 있다. 명상의 강물이 유유히 흘러간다. 머리에 쓴 모자는 세 개의 꽃잎으로 만든 것 같은데, 삼산관(三山冠)이라 한다. 세 산을 조형한 관을 썼으니, 산의 만 년 명상을 이고 있다. 그런데도 간소하고 홀가분하다. 얼굴 길이 만한 긴 귀는 만음(萬音)을 듣고 있는가. 이 마음의 귀가 들리지 않는 우주음(宇宙音)까지 죄다 듣고 있는가. 만음을 듣고도 입을 다물고 있다.
동(銅)으로 만들었지만 부드럽고 육감적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명상이 흐른다. 남자인 듯한데 잘록한 허리는 여성적인 선과 육감을 가졌다. 편안하고 온화한 표정과 자세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명상의 중심점 위에 앉아 있어서 그러한 것일까. 금동반가사유상에서 한국인의 깊은 사유를 본다. 반가사유상 양식은 서기 6, 7세기에 걸쳐 신라, 백제, 고구려에 유행하여 삼국미술의 뛰어난 예술성을 보이고 있다. 오른쪽 다리를 올려서 왼쪽 다리 무릎 위에 얹는 것을 '반가(半跏)'라 하고, 오른손을 들어 손끝을 턱에 댐으로서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나타낸 것을 '사유(思惟)'라 하여 '반가사유상양식'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반가사유상엔 한국인의 영원을 향한 추구와 마음이 담겨있다.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많은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경지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삼산관을 쓴 금동반가사유상(국보 83호)과 일월보관(日月寶冠)을 쓴 금동반가사유상(국보 78호)이다.
일본 국보 1호이기도 했던 목조반가사유상은 우리 금동반가사유상(국보83호)을 빼놓은 것처럼 닮았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일본을 방문하여 목조반가사유상을 보고 찬탄하였다.
'인간 존재의 가장 맑고 깨끗한 가장 원만하고 영원한 모습의 표정이다.'
70년대 어느 날에 일본의 한 미술학도가 이 목조반가사유상에 반해 그만 와락 껴안는 바람에, 오른쪽 손가락 하나가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에 알려진 것이지만, 불상의 재료가 된 나무가 일본에선 생산되지 않는 적송(赤松)이어서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이거나 재료를 가져가 만든 것이라고 추정된다.
야스퍼스는 일본 광륭사의 목조반가사유상 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가 우리 나라에 와서 이 불상과 꼭 닮은 금동반가사유상을 보았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인간 존재가 최초로 완성한 가장 맑고 원만하며 영원한 모습의 표징을 한국인이 구현해 낸 것을……. 반가사유상엔 한국인 꿈꾸는 영원의 하늘과 청정한 마음이 있다.
공항 대합실 의자에 앉아 흘깃 금동반가사유상을 쳐다보면서 시·공을 초월하는 영원의 표정을 살펴본다.
'반가사유상은 무엇을 생각할까?'
사유의 끝없는 실타래는 영원에 닿아있을까. 깨달음의 심연에 닿아있을까.
'인간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목마르고 알 길 없는 아득한 물음 앞에 앉아있을 것이다. 이집트 대 피라미드 앞의 스핑크스도 풀 길 없는 이 물음 앞에 오늘도 앉아있을 것이다.
내가 반가사유상을 좋아하는 것은 바라만 보아도 너무나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고요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면 시·공을 잊어버린다. 존재도 삶도 영원도 잊어버린다. 이런 무상 무념의 상태가 좋다. 금동반가사유상에서 깊은 감명을 받는 것은 느낌만이 아닌,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 사유의 깊이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깊은 사유에 빠져있는 상태가 좋은 것이다. 이런 모습이 오히려 마음을 홀가분하게 청정하게 해준다.
석굴암 본존불(本尊佛)은 석가여래가 보리수 아래에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이루는 모습과 표정을 조형화한 것이다. 성도상(成道像)이다. 그러기에 우아하고 위엄있는 가운데 온화함과 잔잔한 법열의 미소를 띠고 있다. 이미 깨달음을 얻었기에 최상 최고 최선의 경지에서 오는 이상과 신비를 느끼게 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생각에 빠져있는 금동반가사유상에선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석굴암 본존불보다 편안하고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나는 금동반가사유상에서 한국인이 피어낸 사유의 꽃을 본다.
깊고도 푸른 물음에 깨달음의 연꽃이 피어나고 있다. 한국인이 피워놓은 명상의 꽃인 것이다.
어느 민족이 금동반가사유상의 표정처럼 오묘한 경지를 표현해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인물상의 표정은 창조할 수 없는 세계다. 삶과 마음으로 꽃피워 놓았을 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미소'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나 여러 나라의 불상과 인물상에서도 이처럼 평화롭고 심오한 경지를 찾을 수 없다. 일에 열중하는 것도 아름다운 것이지만, 사색에 빠져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도 아름다운 모습임을 느낀다.
항공기에 탐승하라는 방송이 울린다. 휴대폰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대열의 끝에 선다.
항공기를 탈 때마다 한 번씩 엉뚱한 생각에 잠긴다. 추락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가족에게 어떤 말을 남길 것인가. 찰나와 영겁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느낀다. 안전밸트를 매면서 반쯤 눈을 감는다.
마음속에서 금동반가사유상이 떠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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