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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찬 손
吳 岐 煥
주말이면 마트에 간다. 아내는 메모지를 펴보면서 식료품을 고르고 나는 바구니를 들고 그 뒤를 좆는다. 바구니에는 일 주일동안 먹을거리가 쌓인다. 김치진열대로 가서 배추김치를 뒤적인다. 종가집김치, 양반김치, 풀무원김치…등이 진열되어있다. 종가집김치를 바구니에 담는다.
지난해에도 김장을 했다. 어머니가 하시던 일을 사십여 년 전부터 아내가 그 뒤를 이어가고 있다. 아내의 수첩에 적혀있는 전화번호 중에는 고춧가루 마늘, 배추, 무를 생산하는 단골집 전화번호도 적혀있다. 가을로 접어들면 수첩을 뒤적이면서 김장거리를 주문하고 때로는 그 집에서 먼저 전화가 걸려오기도 한다. 미리 준비했다가 첫 추위가 올 때쯤이면 김장이 시작된다. 다듬고 절이고 속을 만들어 넣고 완성된 김치를 항아리에 저장한다. 김장을 할 때는 고무장갑을 끼고 하지만 속을 버무리고 배추에 양념을 넣을 때는 맨손으로 한다. 이렇게 김장을 해 넣고 나서는 고춧가루와 양념에 절어 빨갛게 충혈 된, 후끈거리는 손을 찬물에 담그면서 밤을 보낸다. 속을 넣을 때 고무장갑을 끼고 하면 맛이 없다면서 고집을 부린다. 하기는 우리 집 김치가 먹을 만한 것은 아내의 손맛인지도 모를 일이다.
막내는 지금도 가끔 혼자 들른다. 그럴 때면 주방에서 아내의 움직임은 민첩해 진다. 김치찌개를 끓이고 밥솥에다 검은 콩을 평소보다 한 움큼 더 넣고 두부를 노릇노릇하게 부친다. 그리고 김치를 한 접시 담고, 양념장을 만들고 상추를 씻어놓는다. 막내가 좋아하는 반찬들이다. 삼십 여년을 인박히도록 먹어도 물리지 않고 제 가정을 꾸리기 십여 년이 지나도 그 맛을 찾아오는 막내. 어미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고 밥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먹는다. 그 옆에서 더 먹어라 더 먹어라 하면서 한두 수갈 더 먹는 것을 보고서야 얼굴 주름이 펴지는 어미다. 자식은 주름 펴주는 기능성 화장품인가보다.
김장김치 그릇이 빌 쯤인 1, 2월부터는 무 배추 한두 통으로 햇김치를 담가서 상에 올린다. 묵은 김치의 진한 맛이 배였던 입을 햇김치의 상큼한 맛으로 헹궈낸다. 햇김치 그릇에 숟가락이 들락거릴 때쯤이면 이 땅에 봄이 찾아온다. 아내는 김치 깍두기 담그기를 되풀이하다 보면 봄이, 여름이, 가을이 다 가고 김장철을 또 만난다.
몇 년 전까지 만해도 언제 장을 봐오는지 김치를 담그는지 몰랐다. 그런 것은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식들이 혼인해서 분가하고 손자가 생기고 내가 정년을 하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십여 년 동안 아내의 몸놀림은 눈에 띠게 둔해지고 병 치례를 자주하게 되었다. 주의하라는 경고음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늘 하던 대로 무심히 넘긴 후유증을 혹독히 치른 뒤부터는 더 행동이 느려지고 허리도 굽어진 듯 보인다.
오늘 마트에서 김치를 사들고 오면서 앞으론 사먹자고 한다. 미안한 표정으로 당신 편한 대로 하자며 아내에게 먼저 말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400여 년 전부터 고추를 상용화하면서 김치를 발효시켜먹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우리식탁에 한 끼도 빠지지 않고 올랐던 김치. 김장은 반양식이 된다면서 집집마다 독특하고 그윽한 그 맛. 중국의 식도락가들은 ‘소주蘇州에 살면서 광주廣州의 음식을 취하고 싶다’는 말처럼 그 집 아낙의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손맛을 찾아 겨울이면 담 너머를 기웃거리던 입맛들. 그러나 400여년이 지난 지금은 아낙의 손맛을 김치공장이 대신하고 있다. 1년에 6천 700여만 불 어치를 수출하는 김치다. 김치뿐 만아니라 식탁에 오르는 음식들이 공장에서 다량 생산되고 소비자는 이를 사서 먹기만 하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아내가 아침부터 살림정리에 분주하다. 1년에 한 두 번씩 헌 것, 사용가치가 없는
것, 해져서 못쓰게 된 것을 골라내서 재활용품과 폐기용품으로 분류해 놓으면 나는 이를 부대에 넣어서 밖으로 내놓는다. 다용도실에 있는 그릇들도 많이 나와 있다. 가만히 눈여겨보았다. 김장거리를 절이고 씻고 하던 양푼이나 들통은 그대로 있다.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한 김칫독도.
벌써 추석이 코앞이다. 좀 있으면 가을이 깊어지고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김장의 계절이 찾아온다. 말은 사먹자고 했지만, 올해만이라도 김장거리를 들여 놓고, 씻고, 절이고 맨 손으로 양념을 버무려 속을 넣고 밤 깊도록 아린 손을 찬물에 담글 것만 같다. 모르긴 해도 그럴 것만 같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면, 아내의 찬 손, 그 찬 손을 위해 나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나.
창작수필 09 겨울 호 게재09. 9. 23. (11.8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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