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에게 꽃향기이고 싶다
정목일
나는 꽃향기를 좋아한다. 좋은 삶과 인생에선 오래도록 맑은 향기가 풍긴다.어떻게 하면 향기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을까.나의 첫 기억은 목련꽃 향기로 시작된다. 화창한 어느 봄날 아침,나는 외할머니 등에 업혀 집 앞에 있는 도립병원으로 놀러갔다.대여섯 살쯤이었을 것이다. 병원 안엔 아름드리 큰 목련나무가 있었고,바야흐로 목련꽃이 만개하여 눈부신 꽃세상을 만들어놓았다.목련나무 아래서 나는 등에 업힌 채 위를 올려다보며 수천 수만 가지가 하늘로 뻗어나가 무수한 꽃들을 피워놓은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순결한 꽃송이들 위로 햇살이 출렁이고 은은한 꽃향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흰 꽃송이들 사이로 올려다보이는 푸른 하늘이 가슴에 닿는 듯했다.나는 손을 뻗어 목련꽃 한 송이를 따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라도아름다운 그 세계에 닿고 싶었다. 그러나 손끝이 꽃에 닿을 듯 닿지 않았다.“할매! 꽃 하나 따줘!”나는 외할머니를 졸랐다.
“안 돼. 누가 보면 야단칠 텐데….”외할머니는 멈칫거리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내밀어 목련꽃 한 송이를꺾어 내 손에 막 쥐어줄 찰나였다.“꽃을 꺾으면 안 돼요!”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안경을 낀 의사 한 분이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아이구, 어째! 할매가 이 나무에 그만 목을 매고 말까?”외할머니는 무안한 김에 내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나는 두렵고 민망해서 으앙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의사는 어느새 자리를 피하고 없었다.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나의 손엔 목련꽃 한 송이가 쥐어져 있었다.목련꽃을 코에 가져가 보았다. 어머니의 살내음 같은 향기가 흐르고 있었다.
십리향(十里香)은 아직 내 마음에 남아 있다.어릴 적 우리 집에는 난초를 그린 액자가 걸려 있었다.이 그림의 화제(畵題)가 「난향십리」(蘭香十里)여서 난초보다 화제가 머리 속에 또렷하게 박혀 있다.난향이 아무리 멀리 뻗힌다 해도 어찌 십 리까지 갈 것인가.과장법도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나고도 내 가슴에 그 향기가 남아 있으니,십리향이 아니라, 내 청소년기를 기억하게 하는 마음의 향기가 아닐 수 없다.
백리향(百里香)은 꿀풀과의 낙엽 반관목으로 높은 산정이나 바닷가의 바위틈에서 자란다.잎은 긴 타원형을 이루고 홍자색 꽃은 유월 훈풍을 만들어준다.눈길을 끌지 못하지만 멀리 향기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종소리가 아무리 깊고 은은해도 십 리 바깥에서 잘 듣기 어려운 법이지만,백 리까지 향기를 풍기는 꽃의 마음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울까.백리향쯤 되면 비범을 뛰어넘는 신비향이라 할 것이다. 향기가 눈부시다는 걸 느낀다.어느 해 여름날, J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의 바위에 걸터앉아 말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우리는 시골의 작은 학교에 동료 교사로 근무하면서 정이 든 총각 처녀였다.그러나 내 어머니는 동성동본에다 홀어머니의 무남독녀인 J와의 관계를 청산하라고 재촉하셨다.17세 때부터 어린 동생을 거느린 한 가정의 가장인 나에겐 맞지 않는 처녀라는 것이다.결혼이란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건만, 함께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나는 바위 곁에 핀 백리향을 꺾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 이후 한번도 J를 만난 적이 없지만, 내 가슴 속에는 언제나 백리향이 시들지 않고 있다.
천리향(千里香)은 과히 뇌쇄적이다.짙은 향수 내음으로 코가 아니라, 가슴 속으로 짜릿하게 파고든다.천리향이 풍기면 다른 향기는 숨을 죽이고 만다. 천리향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면,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리따운 신부의 모습이리라.연보랏빛의 천리향은 밤중에도 그 향기로 인해 발걸음을 옮겨놓게 만든다.아, 전생에선가 인연을 맺어놓은 듯한 이 향기…. 그렇기에 정신마저 황홀하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초등학생 시절 학교에 가는 골목길 모퉁이에 있던 기와집의 천리향을 잊을 수 없다.봄이면 그 향기로 인해 어둡던 골목길이 환하고 향기로워지는 듯했다.나는 기와집의 천리향 때문에 골목길이 좋았고, 휘파람을 불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꽃향기로 말하자면 찔레를 빠뜨릴 수 없다.들장미라고 하는 이 꽃은 우리나라 산야 어느 곳이나 아무렇게 피어나는 꽃이다.풀밭이나 개울가나 산비탈을 가리지 않고 땅위로 뻗어나가 소담스런 꽃을 피워놓는다.꽃이 너무 향기롭고 어여뻐 한 송이라도 꺾으려고 하면 날카로운 가시에 질린다고 하여,‘찌르네’라는 말이 ‘찔레’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모습과 향기가 너무나 순진하고 깔끔하여 열일곱 살 소녀처럼 느껴진다.어릴 적 어머니가 찔레꽃잎을 따다 말려서 넣은 베개를 만들어주셨다.날마다 향기로운 꿈을 꾸면서 몸도 마음도 향기롭고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나는 꽃향기이고 싶다.꽃향기로 인생을 시작하였으니, 꽃향기로 살다 가고 싶다.그러나 나는 아직 어떤 꽃향기도 지니지 못했다.좋은 향기란 맑은 마음과 깨끗한 인품에서 저절로 풍기는 것이리라.향기로운 꽃을 피우기 위해선 마음의 밭을 갈고 가꾸어야 할 것이다.진흙 속에서 연꽃은 피고, 자갈밭이나 사막에서도 식물은 일생에 한 번 꽃을 피운다.나는 멀리 가는 백리향이나 천리향보다 주변의 가난한 마음을 적셔주는 향기이고 싶다.나는 말없이 그리운 이에게 다가가는 꽃향기이고 싶다.외롭고 아픈 가슴을 달래주는 이슬 젖은 꽃향기이고 싶다.*웹진 느티나무에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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