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처럼 빠른 여정
최 문 정
우리는 느리고 할인이 되는 기차표로 바꾼다. 단 식당 칸이 있는 기차다. 타자마자 아예 식당 칸으로 직행한다. 식당 안은 텅 비어 있다. 테이블이 있는 넓은 창가로 가서 마주하고 앉는다. 기차가 움직이자 먼저 커피를 시킨다. 그것도 한잔만. 종이컵으로 두 잔을 만들지만 넘친다. 넘치는 잔에 얼른 입을 대고 한 모금 마시다 마주앉은 사람을 본다. 주름진 얼굴에 가버린 젊음이 살짝 남아있다. 대단한 발견이다. 순간 입에서 웃음이 팍 나온다. 그가 의아해하며 눈으로 묻는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 발견은 나만의 비밀로 나두기로 한다.
애들은 이런 맛을 모른다. 부모는 낭만도 없는 줄 안다. 기차는 도시들을 스치며, 빈 들판을 지나가기도 하고 먼 산을 바라보면서 물위를 달리기도 한다. 달리는 기차 속에서 보면 지나가는 것은 무엇이나 다 아름답다. 우리의 인생처럼 말이다.
조바심하고, 애타하던 날들이 지금은 도리어 아쉽고 그리운 건 웬일일까.
책을 꺼낸다. 우리 집 양반은 월북 작가가 쓴 황진이를 꺼내고 나는 그동안 읽지 못했던 수필집을 꺼낸다. 우리가 긴 기차 여행을 택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책을 읽다가 가끔씩 창밖을 본다. 내용을 머릿속에 담아보다 창밖풍경에 정신을 놓기도 한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세월처럼 풍경은 머물 줄을 모르며 지나간다. 그렇게 지나가는 시간들이 너무 편안해서 이 시간이 끝없이 이어졌으면 바란다. 종종거리며 살 때도 아닌데 이런 휴식이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아무리 이 시간이 좋아서 길게 붙들고 싶어도 그래도 종착역은 다가온다. 아쉬움을 끝내고 내릴 수밖에 없다.
부산에 도착하면 우리는 자갈치 시장을 먼저 찾는다. 자갈치 시장은 언제나 붐빈다. 그 비좁은 골목길에 버스를 세워 놓고 관광객들을 풀어놓으니 더 붐비게 되어있다. 그 붐비는 속을 헤집고 다니다 보면 시끄럽게 떠드는 사투리 속에서도 싱싱한 생선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갈치를 산다. 제법 굵다. 도미도 산다. 이제부터 우리의 소꿉놀이는 시작 되는 것이다. 여기는 해운대에 있는 콘도다.
쌀을 안친다. 손질한 생선에 집에서 준비해온 야채, 양념을 한 주먹씩 듬뿍 듬뿍 넣고 끓이고, 조리고, 슈퍼에서 사 온 김치를 놓으면, 진수성찬이 되는 것이다.
집에서는 국 하나 끓이는데도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여기서는 모두가 간단하고 신속하다. 그래도 맛은 기가 막히다. 바다가 보여서일 것이다. 아니면 갈매기 소리가 들려서일지도 모른다.
처음엔 나와서까지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만류하더니 우리 집 양반이 나보다 더 좋아한다. 여기는 생선도 더 맛이 있단다. 집에서도 둘이 식사 할 때가 대부분이지만 이곳에서 둘은 좀 다른 거 같다. 이걸 오붓하다고 해야 하나 알차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재미있다.
차는 나란히 앉아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마신다. 파도는 출렁이면서 하얀 거품을 만든다. 그리고 흰줄을 만들어 한줄 한줄 모래사장에 던지면, 파도는 그곳에서 부서지곤 한다. 마치 모래사장에게 장난을 치는 거 같다. 작은 물새가 종종거리며 그 파도를 따라다닌다. 세 살짜리 우리 손자 놈처럼 말이다. 그 녀석을 여기다 데려다 놓으면 저 물새처럼 파도와 잘 어울릴 터인데 아쉽다. 다음은 데려 와야지,
바다는 점점 검어 보이고 거품은 더 희어 보이기 시작한다. 어두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는 양이 안 찬다. 모래사장을 걸어본다. 방금 물먹은 모래사장에 발자국이 선명하다. 그런데 곧 지워지고 만다. 흰 거품이 그대로 놔두질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또 만든다.
젊은이들이 쌍쌍이 앉아 있다. 그 수도 조금씩 늘어난다. 그들은 검은 바다 위로 불꽃을 터트리며 환호 한다.
‘쏴-악,’
파도가 환호 소리를 삼킨다. 작은 별들이 공중 속으로 퍼졌다가 사라진다. 파도가 별들도 다 먹어버리는 모양이다.
여기서는 파도가 왕이다. 그 소리는 거대하다. 그 몸짓도 우람하다. 하늘 아래 이 보다 더 큰 몸짓이 또 있을까. 없을 것이다. 이보다 더 우렁찬 소리도 없을 것이다.
파도소리에 묻히다 보면 나는 모래알처럼 작아진다. 꿈도, 많은 이야기도, 아무 사연도 담겨 있지 않은 작은 내가 파도 앞에 앉아 있다.
‘그렇지, 내가 살아 온 이야기가 있기나 한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 그것 외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밤은 점점 깊어지는데 사람들은 바다 곁을 떠날 줄을 모른다.
이박삼일이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는 사이에 다 날아가 버린 것 같다. 그래도 약속한 시간이 되었으니 떠나주어야 한다.
우리는 다시 기차를 탄다. 테이블을 마주하고 자리에 앉는다. 창에 가득찬 집들이 서서히 움직이면서 부산이 우리를 떠나가고 있다. 손을 가볍게 흔들어 준다.
책을 꺼내서 테이블위에 놓고 펼친다. 읽다 남은 부분을 다시 읽는다. 읽는 즐거움에 시간이 가는 것도, 우리가 가고 있다는 것도 잊고 읽는다. 그러는 사이 어두움을 헤치고 애들이 기다리는 서울을 향해 기차는 열심히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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