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의 벤치
임선희
여의도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초록이 선명한 유월의 아침나절, 방송국 중앙 현관의 계단을 곧장 오르려다 문득 그 앞의 녹지대가 궁금해졌다. 어떻게 생긴 곳인가.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다.
5천 평은 되지 않으려는지, 겉보기와는 달리 실속 있게 넓은 땅에 나무들이 들어서 있다. 소나무, 잣나무, 느티나무, 전나무, 은행, 단풍 그리고 비원에서나 만날 듯한 수양버들의 고목들, 유연하고 섬세하게 가지를 늘어뜨린 이 수양버들 때문일까, 주변의 분위기가 대체로 여성적이다.
잔디 사이로 몇 갈래의 오솔길이 이어지고, 그 끄트머리쯤에 등나무 덩굴을 올린 시렁이 보인다. 군데군데 벤치도 눈에 띈다. 이 구역만 옴폭 패여서 정적이 괸 것모양 아늑하다. 이런 곳도 공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혼자서 광장의 공원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좀 더 속으로 들어가 봤더니 나 말고도 사람이 있다. 한 젊은 남자가 벤치 위에 반듯이 누워서 잠을 잔다. 왕성하게 코를 골며 깊숙이 단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아하, 요즘도 이런 데서 이렇게 잠을 자는 사람이 있구나.’
나는 사뭇 감탄해서 그 정경을 바라보았다.
어려서 나는 틈만 나면 사직공원으로 놀러 갔다. 내가 살던 신문로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사직공원은 문자 그대로 광대하기도 했지만, 사철을 두고 무궁무진하게 흥미로운 곳이었다.
갖가지 수목의 열매와 꽃과 나비, 인왕산 계곡을 타고 내려온 차가운 물과 큼직큼직하게 잘생긴 바윗돌.
저녁놀 속으로 흐르던 달걀 빛깔의 구름과 풀내음이 스며든 아침공기, 그리고 흰 눈발 위로 떨어지던 가느다란 새 그림자…….
공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숲에 가까웠다고 할까, 울창한 이파리들이 머리 위를 날개처럼 덮고, 그 일대는 한낮에도 어두컴컴하여 으슥했다.
이 모든 것이 합쳐서 통째로 자유롭고 분방한 곳이었다.
서울의 문안에서 태어나 거기서 이십 년 간의 성장기를 보낸 내가, 자연을 체감할 수 있었던 최초의 착실한 공간이 사직공원이었다.
그곳 여기저기엔 벤치가 놓여 있었다. 청색의 그 나무의자 한 개씩을 차지하고 거지가 누워 있는 장면이 자주 눈에 들어오곤 했다. 벤치 위에 네 활개를 펴고 누워서 시도 때도 없이 낮잠을 즐기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온 공원을 진종일 싸다니는 것으로 보였다.
극도로 때가 낀 얼굴은 새까맣게 윤이 나고 텁수룩한 머리에선 도마뱀이라도 기어 나올 것 같고……. 그런 몰골로 불쑥불쑥 나타나선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리고는 이쪽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싱긋이 웃어 보이고 가버린다.
행인에게 손을 내밀어 구걸하는 일는 없다. 그냥 작대기로 구석구석을 뒤져서 음식 찌꺼기며 무슨 나부랭이들을 일념으로 주워 올리는 것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들은 거지가 아니라 실업자 내지는 부랑자였을 것이다. 좌우간 그들 나름의 정신구조와 생활철학을 가졌던 것인지, 애교 있는 거지들이었다.
그 시절 유달리 눈길을 끌던 여자 거지를 나는 기억한다. 그 여자는 맡아놓고 사직단 정문 밑에 앉아 있었다. 항상 어린 딸 하나를 곁에 데리고.
여섯 살 가량의 딸아이는 언제 봐도 옷차림이 깨끗했다. 거지답지 않게 모양새가 말끔해서 나는 그 애의 얼굴을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약간 들창코에다 조그맣고 까만 눈이 수박씨를 닮았다. 어느 여름날 저녁 무렵, 나는 공원을 내려오다 저만치 그 모녀거지를 발견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그들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길가에 등을 돌리고 나란히 앉아서 둘이는 이마를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나는 그들 옆으로 다가갔다. 그랬더니 어쩜! 엄마가 딸의 손톱에다 봉숭아 꽃물을 들여 주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묘한 감동을 받았었다고 시방 말하고 싶은 것은, 아직도 그 때의 광경이 뇌리에 선연히 찍혀 있기 때문이다.
사직공원의 벤치와 거지와 봉숭아 꽃물 - 그것은 명동거리의 다방과 문인과 커피 향기 이상으로 나로선 지울 수 없는, 지우고 싶지 않은 옛 서울의 영상이다.
지난봄이었던가, 유럽의 공원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었다. 해설자의 음성이 흐르고 있었다.
“저기 벤치에 다정히 앉은 노부부. 말 없는 가운데 가슴으로 수많은 추억을 나누고 있는 저 노인들의 모습은 얼마나 보기 좋은 것인가. 젊은 시절을 알차게 보낸 다음 이제 노년을 우아하게…….”
그들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일종의 시위를 펼치고 있는 게 아닌가. 나에게 손주를 돌려다오, 가정을 돌려다오. 고독한 노인들이 외치는 무언의 구호가, 비명이, 내 귀에는 울려 올 뿐이었다. 우아하다는 표현은 차라리, 사직공원 벤치에서 팔자 좋게 낮잠을 자던, 혹은 딸아이 손톱에 봉숭아 물감을 들이던 그들 거지에게 바쳐야지 하고 나는 일순 생각해 보았다. 이 얘기를 교양국의 어느 PD에게 들려주었더니, “흘러간 것은 모두가 아름답다로군요.”
그는 뱉듯이 말했다. 그의 단순 명쾌한 멸시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의 신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거리에서 거지가 사라지면서부터 서울은 약탈의 도시로 바뀌었다는 것. 거지들이 낙엽처럼 뒹굴던 세상에선 최소한 인간에게 있어 인간이 증오와 공포의 대상은 아니었다는 것 말이다.
며칠 전 나는 또 한번 그 광장의 공원을 찾아갔다. 두 달 사이에 초복·중복을 넘기고, 장마가 걷히고, 여름은 고추모양 약이 올라 돌에서도 수풀에서도 열기가 튄다. 바람은 없고 인기척도 없다. 다만 매미들이 버들가지에서 퍼붓듯이 울어댄다.
나무 아래 벤치에서 그때처럼 젊은 남자가 잠을 자고 있다.
이번엔 잠자는 남자가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어났다.
직업이 없어 이 도시를 떠도는 사람일까, 직업은 있지만 이 도시에서 자신의 방을 갖지 못한 사람일까. 사관학교 생도들의 사열식처럼 질서정연하고 엄격한 여의도광장의 풍경 속에서 그들의 헐렁한 모습이 왠지 죄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벤치의 두 남자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나는 발소리를 죽여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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