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향만리 (情香萬里)
김 순 재
구독하는 수필지에서 존경하는 스승님의 글을 읽었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란 제목의 짧은 권두 수필이다. 아흔 해를 가깝게 두신 스승님의 혜안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나의 방에는 화향천리 정향만리(花香千里 情香萬里)라는 글 한 폭이 걸려있다. 그냥 걸어놓은 글씨가 아니고, 마음으로 느끼고 피부로 깨닫기 위해서라고 할까. 진짜 정향은 만리를 간다고 생각한다. 만리뿐인가 영원히 가고 있다. 설사 생명이 다한다 해도 정에는 한계가 없다. …..생명에는 한계가 있다. 영원할 수가 없다. 그것을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생물이 인간이다. 인간의 그 무모한 생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끝없는 욕망 때문이다.” 대강 이런 내용이다. 그리고 “….왜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는 ‘인생은 일장춘몽이다’를 생각하다가 마침내 정향만리에 이르고 말았다. 그 두 가지 생각을 써보고 싶어서 펜을 든 것이 못난이의 어절한 사설이 되고 말았다.”로 끝맺음을 함축한다. 울림이 깊었다.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알지 못했던 지난 세월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정향만 만리랴. 글향도 만리를 갈 것이다. 한 줄 글의 위대함을 가슴에 얹고 스승님께 안부 전화를 올렸다.
수리산 기슭, 선생님 댁 앞에 택시를 세우니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계신다. 손을 들어 반기시는 선생님을 모시고 근처 보리밥집에서 점심을 하기로 한다. 부드러운 별미를 대접하리라 마음 먹고 찾아 뵈었는데 원치 않으신다. 원체 겸양하신 분이다. 주인 아주머니의 하는 양으로 봐서 제자들이 찾아오면 자주 들리시는 집인 듯 하다. 흰밥과 나물, 강된장을 앞에 놓고, 선생님께 수업 받던 시절의 얘기며, ‘일장춘몽’에 대한 어쭙잖은 내 감상이며, 기억에 남아있는 그 시절 문우들의 작품 이야기를 한다. 성인이 되어 문화센타에서 맺은 스승과 제자 사이이지만 엄연히 하늘 같은 스승이시다. 그러나 공통의 관심사를 이야기하는 대화친구처럼 소탈하게 대해주신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정중하시다.
수필을 가르치던 시절에도 그러셨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글일지라도 타박하지 않고, 당신의 주장을 내세워 단정짓지 않으셨다. 기다려주시고, 이해해주시고, 열어놓고 계셨다. 스승님께 배운 것은 수필작법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의 격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웠다. 내가 햇수로 오 년여를 배우고 등단 했을 때, “등단 후 십 년은 더 정진해야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다” 하셨다. 그 말씀이 고서(古書)에 배인 향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뵙지 못한 사이 몸이 많이 쇠하여지셨지만, 아직도 글을 쓰실 만큼 정신이 맑으시다. 예나 다름없이 꼿꼿한 자세와 흐트러짐 없는 인격. 오색물이 흠뻑 든 깊은 산 나무 같다 하면 무례한 표현일까. 사람의 겉 향이 꽃이면, 내면의 향은 단풍처럼 흠뻑 익은 인격이리라 싶다. 화향천리 정향만리란 말도 원래는 유향(劉向)이 쓴 고서 설원(說苑)에 나오는 화향천리 인덕만년훈(花香千里 人德萬年薰)이란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지 않든가.
출입문을 나오시며 “김선생 올해 몇 살 되었지요” “어느새 일흔을 훌쩍 넘겼습니다” “허허. 이렇게 찾아오기 힘든 일인데” “기회 되면 또 봅시다” 기회 되면 또….마음이 아득하다.
돌아오는 길. 집 앞 공원 꽃밭에서 나도 모르게 발이 묶였다. 왜 서있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꽃 떨어진 코스모스 메마른 꽃대에 시선을 멈추고 있다. 말라버린 대궁이 무리 지어 흔들린다. 꽃이 없어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아름다움이다. 애써 맺은 수과(瘦果)는 바람을 타고 빗물을 타고 제 갈 길로 가서, 나름의 꽃을 피울 봄을 준비하고 있겠지. 나는 세상을 지나면서 알지 못하여 버린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슴을 깊이 열고 “일장춘몽 정향만리”를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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