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고에 피박 입니다 / 조한금
화투하면 먼저 생각나는 분이 친정아버님이시다. 아버지는 조석으로 늘 패를 떼시며 홀로되신 외로움과 무료함을 달래셨다. 갑오 패는 1월의 송학과 2월의 매조, 6월 목단을 합한 숫자 아홉 끗을 일렀다. 석 장 합한 숫자가 열아홉 또는 스물아홉이어도 떼어내는 이 패는 다 떨어지기 까지 시간이 꽤 걸려 홀로 시간 보내기 적격이었다. 아버지는 그 외에도 다양한 패를 떼셨는데, 백두산 패나 춘향 패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며 어쩌다 떨어지는 날엔 되레 재수 좋은 일이 생기려나보다고 좋아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화투 패를 익힌 나는 어렸을 적엔 가끔씩 아버지의 흉내를 내보곤 했다.
“총각 때, 동네 사랑방에서 눈 한번 붙이지 않고 3일 밤낮을 꼬박 새운 적 있었더니라. 그
리고 나니 방바닥에 널브러진 것이 죄다 3,8 광땡으로 보여 집어보면 다 티 검불이더라.”
하셨다. 아버지는 그 후론 두 번 다시 노름에 손대지 않았다며 ‘마누라 속곳도 들고 나가 잡혀먹는 것이 도박의 속성’이니 아예 근접을 말라고 오빠를 단속하셨다. 그러면서도 어린 내게만은 민화투는 물론 6백이며 8백, 짓고땡 등을 가르쳐 주시면서 화투를 치자하셨다. 어린 딸과 심심풀이 화투를 치면서 여생을 올인하여 따고자했던 것이 고작 무형의 사랑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 세월에 이르러서야 사람이 한 생을 사는데 화투짝만이 도박의 도구가 아닌 일생을 건 또 다른 노름꾼을 만나본다.
몇 번씩 다녀온 부소산성의 사비성이니 새로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부여다. 다만 퇴락 한 역사의 현장에서 흥망성쇠가 한낱 물거품이란 생각을 하며 3천 궁녀가 꽃잎처럼 떨어져 내렸다는 낙화암 절벽이나 굽어다보고, 고란사 경내 한 바퀴 휘휘 둘러 돌아서곤 했던 곳. 그곳을 창작수필 가을 세미나의 방문코스로 찾아들었다.
한 뿌리에 한 잎으로 30년을 살아낸다는 고란초가 이제는 바위가 아닌 유리 상자 속에서 자라고 있다. 한잔에 3년이 젊어진다는 고란수 한 컵을 마시고 백마강 나루터로 내려가 보니 목선 두어 척이 한가롭게 떠있다. 법당마당에서 스님의 대금연주가 있을 것이라는 공지를 잊고 강가로 내려갔다가 대금가락에 이끌려 다시 절 마당 안으로 들어서니 풍채 좋은 스님이 대금연주 한 곡을 막 끝내고 있었다. 스님은 범종이 있는 단에 올라서서 ‘무공無空’이라고 자기를 소개 했다. 이곳에 5년을 머물고 있다는 그는 마치 신명난 소년처럼 상기된 얼굴로 대금을 지팡이 삼아 많은 문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작시 한 수를 풀이를 곁들여 낭송했다.
千年古都 扶蘇山 白馬長江 萬年流- 천년의 서울 부소산 아래 백마 긴 강은 만년을 흐르고
江上斷崖 皐蘭寺 皐蘭草香 千年新- 강위 벼랑 고란사의 고란초 향은 천고인데도 새롭구나.
白花亭前 千年松 萬古靑靑 百濟節- 백화정 앞 천년 노송은 늘 푸르러 백제의 절개 같고
落花菴畔 杜鵑聲 三千宮女 斷腸曲- 낙화암 기슭 두견의 울음소리 삼천 궁녀의 단장곡이로다.
興亡盛衰 古今事 夢中之夢 幻中影- 흥망성쇠의 고금이 꿈속의 꿈이요 허깨비의 헛 그림자라
無常春風 江上飄 浪僧一笛 千年限- 덧없는 봄바람이 강 위에 나부끼니 떠돌이 중의 대금소리
엔 천년의 한이 서렸구나.
뜻밖이었다. 스님은 본디 근엄하여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도인이며 학문이 깊으니 입적하면 그 결정체인 진신사리가 나온다고 생각했던 내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트린 행동이었다. 마치 천년을 죽어있던 적요의 고란사가 갑자기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이 느껴졌다. 풍류를 다스리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공생의 멋을 알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내면의 고통과 갈등을 이기며 자기를 연마했을까. 시공을 자유자재로 막힘없이 넘나들 줄 알고, 있는 듯 없으며 채우고도 비우는 법을 알아 무공이라 이름 했는지, 내 눈에는 그가 마치 일필휘지의 붓글씨요. 명창 김영임이 부르는 회심곡처럼 무르익어 보였다.
그는 곧 자신의 거처 고란사를 느닷없는 화투로 풀어냈다.
“이곳은 쓰리고 입니다.”
모두들 의아히 바라보니
“고란사가 있어 원 고요, 고란초가 있으니 투고요, 고란수가 있으니 쓰리곱니다.”
나는 얼른 손을 들어 그에게 화답했다.
“잠깐만요, 거기에 스님이 계셔서 피박 입니다.”
회원들은 모두들 호쾌하게 웃었다. 그랬다. 그는 우선 삭발했으니 피박 인데다 신산의 고단한 삶으로 지친이 들을 감성적으로 위로하고 치료할 줄 알기에 인생 노름판에서 곱빼기의 곱빼기를 따는 쓰리고에 피박의 노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마아 가아앙에 고요한 다알바암아 고란사의 종소리이가….”
구곡간장을 에는 듯한 애절한 멜로디가 그의 대금에서 다시 흘러나왔다. 그 가락을 들으며 월하月下였더면 더 제격이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일었다. 앙코르곡 칠갑산 연주를 끝으로 백마강 물놀이에도 합석해준 스님을 보니 갑자기 김삿갓과 원효대사가 떠올랐다. 하늘이 부끄러워 평생 삿갓을 쓰고 전국을 떠돌며 한시를 읊었던 김립 선생이나 요석궁을 월담해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얻은 원효대사가 같은 부류의 사내일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그에게서 진정한 노름꾼의 기질을 본 때문이리라.
나는 합장하고 하직 인사하는 무공스님을 한 번 더 불러 세워
“스님! 요석공주를 만났으면 설총을 얻을 뻔했는데요.”
하며 짓궂게 농담하니 곁에 있는 문인이 한술 더 떠 그러면 어쩌시겠느냐 묻는다.
“순리대로 따라야지요. 거스르지 않겠습니다.”
받아쳐 화답하는 스님의 사고는 진정 시공을 거침없이 자유로이 넘나드는 무공無空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대로 의지대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내 안목이 좁아 일생을 도박에 걸어 이렇게 이긴 사람을 별로 많이 본적 없으니
“스님이야말로 쓰리고에 피박입니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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