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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
방 계 은
화초를 지극히 좋아하는 까닭은 그와의 만남이 원천이었다. 두 세평 남직 하던 꽃밭이었다. 그렇건만 마당을 가득한 꽃나라로 꾸며주던 추억이 내 마음자리에 화종(花種)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재작년이다. 어디서 묻어왔는지 나팔꽃 떡잎 하나가 얼굴을 내밀더니 옆에 아마릴리스 잎을 타고 한 송이가 피어났다. 그 꽃은 아픈 상처를 애써 외면하고 살아왔던 내게, 이젠 옛이야기로 돌리라며 다가왔다. 꽃자줏빛 융단에 하얀 테를 두른 화려한 나팔꽃은 아니다. 그저 수수하게 연보랏빛을 띠고 다소곳이 피어있다. 그러나 나는 그 앞에서 소녀 적에 살던 한옥 뜰을 넘나든다. 어스름 새벽이슬 머금고 기상나팔을 불던 옛집에 꽃으로만 보이는 것이다.
그 집에 나팔꽃은 유별나게 컸다. 꽃잎 또한 아름다워 우리집 대문에서 안채까지는 비로도가 깔린 궁궐 같았다. 꽃봉오리가 한순간 펑하고 펼쳐지는 신비로운 모습을 지켜보며 느끼는 감동은 어린 가슴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아 새벽잠을 설쳤다. 서쪽 하늘 끝에 달빛은 스러지고 서늘한 공기가 대지를 맴돌 무렵부터 나팔꽃 세기는 시작되었다. 열, 스물, 백, 내 목소리에 동생들도 깨어났고 우리는 합창을 했다. 여름이면 수백 송이의 꽃이 피었고 한낮이면 그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방학숙제를 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나팔꽃이 한창 피어오르던 여름에 우리는 그 꽃을 전부 걷어치워야 했다. 꿈에라도 있을 수 없는 일, 문상객들이 앉아야 할 자리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넝쿨 순이 타고 오르기 좋게 쳐놓았던 철사에는 밤이건만 대낮같은 전등을 밝혀야 했다. 아버지는 잎사귀들이 어지러이 널려있는 뜰을 즈려밟고 대문 밖이 저승이라는 회심곡의 노랫소리와 함께 떠나셨다. 그때부터 우리 형제에게 나팔꽃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지 못할 금기사항이었다. 잊으려 할수록 그 꽃은 뜰이 아닌 가슴에서 더욱 깊게 뿌리내리고 있건만 한 번도 입에 올린 일이 없다.
메꽃과의 일년생 만초(蔓草)이며, 종자는 견우자(牽牛子)라 하여 통변(通便), 부종(浮種), 적취(積聚), 요통(腰痛)에 좋은 약으로 쓰인다는 꽃이다.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계속 피어나서 날이면 날마다 보는 이의 가슴을 기쁨으로 꽉 차오르게 한다. 그러니 봄에 한 번 피면 그만인 등나무보다 소박하나 사랑을 베풀 줄 아는 꽃. 새벽안개 속에 진주이슬 안고 피었다가 햇살이 눈부시다고 접는 꽃의 전해오는 일화는 이렇다.
사랑하는 아내를 고을 원에게 빼앗기고 부인만 생각하다가 미쳐버린 화공이 있었단다. 화공은 그림 한 장을 아내가 갇힌 성 밑에 파묻고는 죽고 말았다. 얼마 후 부인은 매일 똑같은 꿈을 꾸었단다. 남편이 나타나 밤엔 당신을 찾아오지만 해가 돋으면 당신이 잠을 깨므로 또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부인이 이상히 생각하여 철창 밖을 보니 그리움에 겨워 위로만 피어나는 덩굴 꽃을 보았다. 부인은 그 꽃이 남편의 넋인 것을 금방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일명 견우화라는 그는 어쩌면 내 아버지의 꽃 같다.
아버지처럼 한 집안에 가장노릇을 착실히 하신 분도 드물다. 8남매의 맏이로서 책임을 모두 챙기셨다. 그러면서도 일요일이면 가족들과 야외로 소풍을 가든지 아니면 단성사에서 하는 창극을 구경시켜 주셨다. 후식으로 그 시절 귀한 기호품이었던 아이스크림을 사주시면서. 저녁이면 양팔이 무겁도록 갖가지 과일이나 양과자를 사들고 오셔서 맛있는 군것질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여름 뜨거운 햇볕을 피해 찾아드는 손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나팔꽃 잎새처럼 식솔들을 넉넉하게 감싸던 분이다.
결혼해서 10년쯤 지났을 때다. 남편과 연극구경을 갔는데 좌석이 없단다. 다음 회를 기다리는 사이 근처 찻집에서 오붓이 시간을 보내면 좋으련만, 남편은 두말없이 집으로 향했다. 20년을 넘게 살도록 퇴근길에 아이들 기호식품 한 번 사들고 오는 일이 없다. 어쩜 그렇게도 내 아버지와 다를까. 그런 날이면 한 이불에 들기 싫다. 등 돌리고 누웠으면 이상하게도 나팔꽃이 어우러지던 옛집이 떠올랐다. 멋을 아셨던 짧고 굵게 사신 아버지.
그러나 어머니와 우리 남매에게 커다란 빈자리를 남겨 놓으셨다. 그 허황함이 너무도 깊어 30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한다. 우리만 그랬을까. 아버지는 당부의 말씀 한마디 못 했으니, 하고픈 말씀 그대로 끌어안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어떻게 돌리셨을까?
그분 떠나신 후 남은 가족의 휘청거림은 바람 앞에 촛불이었다. 그것은 바로 내 남편의 자리이기도 했다. 나는 결코 내 옆에 빈자리를 만들지 않으리라. 남편 쪽을 향해 다시 눕고 그의 손을 잡곤 했다. 건널 수 없는 강 너머로 가신 지 그리도 오래건만 그렇게 내 평생의 지주목으로 서 계시는 아버지다.
아버지 살아계셨을 때 내 별명은 맹꽁이였다. 초등학교 때는 한 달도 넘게 결석을 했고 튼튼해졌다고 내심 안심하셨지만 여학교 때도 일주일씩 결석을 했다. 그렇게 병약한 소녀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의정부로 옮겨간 나의 담당의사는 일주일에 두 번 단골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어둑한 저녁시간이면 본가로 왔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아버지는 기회에 병약한 딸에게 갈비 한 점 먹이고 싶으셨던 것 같다. 당신 앞에 막걸리 한 사발 시켜놓고 내 앞에는 커다란 갈비 한 대가 놓였다. 두 손으로 잡아도 넘치던 갈비를 잘 뜯어 먹지 못하니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셨다. 그 심상(心想)에 깔려있는 애잔함을 어린 계집애가 어찌 알았겠는가.
정말 맹꽁이처럼 아버지의 가없는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아픔 때문일까. 갈비집에서 잔뜩 주눅이 들어앉았던 소녀는 잊을 수 없는 한 컷의 사진이 되었다.
결혼식에 들러리를 세우던 자유당 시절이다. 신랑 친구, 신부 친구뿐 아니라 꽃바구니를 든 꼬마 신랑과 꼬마 신부도 세웠다. 딸을 빌려 달라는 지인들에게 한복 한 벌 안 해주면 빌려주지 않겠다고 호기를 부리시던 아버지다. 당신 손에 들려오는 간식거리를 기다리다 곧잘 안방에서 잠이 드는 나를 살그머니 안아들고 내 방에 뉘이셨다. 잠결이지만 그 따뜻한 품이 지금도 내 살피에 남아있으니….
단명한 꽃이지만 곁가지에서 계속 꽃을 피우니 그만큼 씨가 많은 꽃이다. 저절로 떨어져 이듬해 봄이면 떡잎이 이곳저곳에서 올라온다. 어려서는 꽃씨를 모아 두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꽃이 일찍 지는 이유는, 당신의 양분을 씨앗에게 알차게 물려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홀로 서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늦게나마 깨우치고 있다.
나팔꽃은 하나, 둘 늘어나 아침마다 내게 방실거리며 인사를 나누잔다. 마음자리에서 긴 세월 흘러 보낸 지금, 내 집 뜰에 피어났다. 나는 아버지의 희망사항이셨던 맹꽁이의 껍질을 얼마만큼 벗어 던졌을까? 태양이 떠오르는 창가에서 나팔꽃을 바라보는 눈시울이 젖는다.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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