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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종소리
청호
낙산사에 도착하자 저녁 여섯시 예불을 알리는 범종소리가 들려왔다. 십일월을 며칠 앞둔 짧은 해는 이미 져서 어두웠다.
운전을 하며 먼저 나온 이정표를 따라 오느라 뒷문으로 들어 왔고, 2005년 산불이 난 이후 처음이어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마침 지나가던 스님이 계셔 낙산사를 어디로 들어가느냐고 물었더니 낙산사에 와서 낙산사를 찾으면 어떡하느냐고 했다. 스님은 휴대전화로 종무소와 연락을 주고받아 우리의 방을 배정받고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 주었다. 새로 지은 집에서 풍기는 나무 향이 아직 짙은 객사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새벽 세 시가 지나자 다시 범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범종은 우주 만물에 진리를 소리로 전하고저 함이다. 새벽예불에는 부처님의 법을 처음 받은 가섭 존자로부터 달마대사까지 28대의 조사를 뜻하는 28번을 친다. 저녁 예불에는 불교의 우주관 중의 하나 33천을 상징하는 의미로 33번 치는데 십분 가량 친다. 지옥 중생이 종소리를 들으면 마음의 번뇌와 고통을 쉰다고 한다. 종을 치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소리에 예불 시간을 짐작하고 법당에 도착도록 알리려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산사의 새벽 세 시,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다. 한 여름이라도 팔이 선뜻하도록 찬 기운이 도는 시간에 끊어질듯 이어지는 종소리는 머나먼 별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느껴진다.
스님들은 자줏빛 가사를 수하고 촛불이 흔들리는 법당에 미동도 없이 앉아 아침 예불을 기다린다. 종소리의 음향효과 속에 한 사람씩 떨어져 앉아 있는 모습은 저마다 한 태양계이며 그 세계에 태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녁 예불 때의 범종 소리는 깊은 울림으로 듣는 사람의 마음속 깊은 아래에 자고 있던 그리움이 인다. 인간에 얽힌 정이 아니라 나와 다를 바 없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 알고 싶은 마음이다.
열반종은 단 한번 들은 적이 있었다. 스님이 입적하셨을 경우 대중에게 알리기 위하여 108번 친다.
조석으로 듣던 종소리와는 달리 종의 낮고도 멀리 웅- -하는 울림은 비장하였다. 연극에서 한 단원을 마치고 잠시 커튼이 닫히듯, 지상에서 나름대로 한 배역을 마쳤다고 온 우주에 고하는듯하였다. 삶이란 스스로 정한 자신의 배역에 혼신을 다하여 살다가는 것이 아닌가.
대부분 사람들은 범종소리를 들으면 경건한 마음이 된다고 한다. 서양의 종과는 다른 부드럽고 긴 울림 때문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불교 국가에서는 예로부터 종을 조성해왔다. 우리나라의 종은 세계적으로 ‘한국 종’이라는 학명이 있으며, 특히 신라의 종은 독보적이다.
서양의 종은 크기가 작기도 하거니와 쇠로 안쪽을 두드려 소리를 낸다. 음색이 맑고 높아 명랑하고 가벼워 마치 비 온 뒤의 햇빛 같다.
우리나라의 종은 통나무를 잘라서 바깥에서 치기에 쇠와 나무가 부딪혀서 내는 소리는 낮고 무겁지만 깊고 부드럽다. 장중한 울림이 저 멀리 퍼져 나가 마치 이른 아침 산허리에 안개가 번지는 듯하다.
낙산사에까지 번진 산불로 보타전과 사천왕문, 홍련암만을 남기고 전부 탔을 때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종이었던 범종도 같이 녹았다. 예종이 즉위하던 1469년 아버지 세조를 위하여 시주하였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다. 남아있던 자료를 참고로 다시 주조하여 2007년에 타종식을 하였다.
종을 걸 때는 소리의 울림을 도우기 위하여 노력을 한다. 누각이라면 그냥 걸지만, 지상에 걸 때는 종 밑에 항아리를 묻거나 둥글게 한 뼘 정도 판다. 그 빈 공간으로 하여금 종소리의 진동을 머금어 울림이 깊어지고 멀리까지 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종각을 다시 지으며 항아리를 묻지 않았더니 종소리가 전 보다 못해졌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종각의 비워 둔 공간과 우리 삶을 생각 해 본다.
말없이 곁에 있거나 혼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의 시름이 사라지는 사람이 있다. 영혼이 성숙하여 바라보면 위로가 되고, 손짓 하나에도 따사로움이 묻어 있는 사람이다. 살아가며 부딪히는 희로애락의 갖가지 상황에서 자신의 내면을 향한 고요한 응시와 깊은 사려로 이룬 푸근함이다. 그런 사람이란 종 아래 비워 둔 공간과 같이 가슴에 빈자리가 있는 까닭이다. 종이나 사람의 마음이나 비워 둔만큼의 긴 여운. 같은 빈 자리지만 끊임없이 갈구하는 사람의 빈자리에는 울림이 아니라 허전한 바람이 머무를 따름이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동해 바다의 잔잔함에 하늘의 달이 도장을 찍듯 둥글게 비쳤다. 파도에 출렁이는 바다에도 달빛은 부서져 빛난다. 내 마음이 고요할 때나 희로애락의 출렁일 때에도 나를 움직이게 했던 마음은 저 달빛과 같이 어느 때나 비췄다.
종소리를 들을 때면 진리를 전하고, 지옥 중생의 고통을 쉬게 한다는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늘 궁금하였다. 새벽예불을 기다릴 때면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저마다 세상을 돌리는 중심임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엄숙한 법당이 아니어도 범종소리가 들리면 손목의 맥박을 헤아리듯 낮고 무거운 울림을 따라 저절로 귀를 기울이게 된다. 순간 바깥의 상황을 향한 눈이 종소리를 따라 자신의 마음을 응시 할 때 지옥을 잠시 벗어나는 시간이 아닐까 한다.
무자.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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