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수 초 / 임복순
창가 엷은 햇살에 나른해진 오후, 불현듯 복수초 생각이 난다. 웃옷 하나를 더 걸쳐 입고 마당으로 나갔다. 담밑에 잔솔은 아직도 겨울을 붙잡고 있다. 찬바람이 매섭게 살갗을 파고든다.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하고 거실 앞 댓돌 사이를 이리저리 살핀다. 노란 잔디잎 사이로 흙덩이를 이고 빼꼼히 문을 연 복수초. 밤사이 언 땅을 깨노라 얼마나 힘든 태동의 배앓이를 했을꼬. 흙덩이를 다 털지 못하고 머리에 이고 있다. 검은 자주빛 꽃받침이 꽃망울을 꼭 싸고 있다. 마치 대아의 움츠린 모습 같다. 막 생겨나는 잎은 여린 꽃대를 탯줄처럼 꼭꼭 감아쥐었다. 생존본능의 힘일까. 식물이나 동물이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그 과정은 닮은 데가 참으로 많다.
오늘도 잠시 밖에 나가서 복수초의 산실을 기웃거린다. 어제보다는 좀더 문을 열었다. 아마도 삼사 일 후면 반쯤 열 것 같다. 기다리는 시간이 좀더 길었으면 좋겠다. 그런 피면서 감격해 하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다.
설한중(雪寒中)에 밖에서 이보다 더 빨리 피는 꽃은 아직 보지 못했다. 노란 꽃잎이 연꽃처럼 둘러섰고, 노란 꽃술 속에선 파란씨방이 영글어 가고 있다. 이 작은 꽃 한 송이에도 저마다의 역할이 다 다르게 활동하고 있다.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피는 것이기에, 꽃은 언제 누가 보아도 청아함을 느끼게 한다.
이 복수초는 눈 속에서 핀다하여 '설연화(雪蓮化)' 또는 '얼음색꽃'이라고도 한다. 이 꽃은 우리나라의 여러 지역의 바닷가나 나무밑 음지에서 잘 자라는 다년생 식물이다. 꽃은 노란색으로 영롱하고 곱다. 꽃말도 '영원한 행복'이다. 퍽 포근한 느낌을 준다. 서양에선 'ADONIS'라 한다. 유럽의 복수초는 붉은 빛이다. 아도니스의 파가 꽃이 되었다는 신화가 있다. 우리와는 아주 다르게 '슬픈 추억'이란 꽃말을 지녔다.
이렇듯 동·서양에서 서로 다른 꽃말을 지녔다는 것은 그만치 사람들에게 애정 어린 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 꽃중에서 설한을 마다 않고 제일 먼저 찾아온 선구자적 의미를 담은 꽃이 아닌가.
오 년 여전에 인천에서 가까운 한 섬에 갔다가 우연히 이 복수초를 구하게 되었다 본래 움지에서 자라고 있던 것이라 언덕위 자리로 옮기니 몸살이 심했다. 잎은 당근 잎을 닮은 것이 그 줄기도 길다, 새 자리로 옮기니 몸살이 심했다 땅에 축 늘어져서 지주를 세웠다. 그늘도 지어 주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며 들여다보지만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또 어찌 보면 깨어날 것도 같았는데 어느 날 땅에 아예 누운 채로가 벼렸다. 공연히 데려왔구나 하는 후회를 했다.
그 이듬해다. 겨우내 답답했던 방문을 열었을 때다. 언덕에서 노란 것이 살랑살랑 손짓을 한다. 언덕위로 올라갔다. 이게 웬일인가! 서운해했던 그 빈자리에서 복수초가 꽃을 피웠다. 잎은 시들었지만 뿌리는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못 보았다면 아무도 모르게 피었다가 가버릴 뻔하지 않았는가 심어 놓고 들인 공이 헛되지는 않았다. 소생해서 다시 돌아와 주니 그 반가움은 더 하다. 그 꽃이 진 뒤 좀더 가까이 두고 보고 싶어서 앞마당 담밑으로 옮겨왔다. 또 그 다음 해에는 양지바른 거실 앞 댓돌 밑,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그런 설한에도 양지쪽은 더 빨리 꽃을 볼 수 있다는 내 욕심 때문이었다.
복수초는 이월 초순이면 얼음속을 깨고 꽃을 피운다. 참 부지런한 꽃이다. 다른 초목이 한창 무성할 오뉴월엔 여름잠에 들어간다. 이런 복수초의 속성을 미처 알지 못하고 집에 데려온 것을 후회했다. 복수초가 잠자리로 들어간 빈자리에는 또 다른 잡초들이 무성하다. '그 자리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우리네의 생각과는 아주 다르다. 앉을 때 앉을 자리를 알고, 그만 떠나야 할 때 자리를 양보하고 훌훌 털고 일어서는 대범함이 마치 군자와도 같다.
자기의 빈자리를 다른 식물에게 내어줄 줄 아는 꽃이다. 얼음 속에서 피면서도 추워서 떨거나 움츠림을 보이지 않는 의연함도 지녔다. 설중에, 영롱한 이 노란 꽃을 보고 있노라면 꽃말처럼 포근한 행복감마저 들게 한다.
댓돌 밑에서 나를 향해 웃고 있는 복수초. 난 지금 그를 향한 고마운 마음을 원고지에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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