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만난 친구 / 안귀순
아침마다 나를 찾는 친구가 있다. 그 때문에 나는 요즘 늦잠을 자거나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다. 방이 너무 춥지 않을까, 덥지 않을까. 보일러 온도를 올렸다 내렸다 집안 구석구석 쌓인 먼지는 없는지. 뜰에 물을 뿌리고, 창문을 모두 열어 맑은 공기를 불러들이고, 새벽부터 부산을 떤다.
그는 천사처럼 선한 눈망울을 갖고 있다. 그 눈을 마주하고 앉으면 아무도 스쳐가지 않은 하얀 설경을 딛고 선 느낌이다. 내 마음 속에 일렁이는 갈등과 이기, 모든 사악함이 눈처럼 녹아 내릴 것만 같다. 세상 때,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선의 결정체. 그 앞에선 아무리 육신이 고달프고 마음이 괴로운들 슬프고 어두운 표정을 지을 수가 없다. 내 혼란한 감정의 빛깔까지 여과 없이 그에게 반사될까 두려워서이다.
그를 만난 것은 골목마다 줄 장미가 불처럼 번져나던 향기로운 오월이었다. 무거운 정적이 감도는 갈색의 둥지에 내린 한 줄기 초록빛 바람이었다. 촉촉이 양수에 젖어있는 검은 머리카락, 붉은 선혈에 얼룩진 고귀한 생명의 꽃. 그것은 신의 축복이었다. 길고 긴 인연의 강줄기를 힘겹게 헤쳐온 듯, 무척 지치고 피곤해 보이던 그 연약한 숨결을 맨 처음 맞이한 감격을 오래오래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내 집에 드나들면서 내 삶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늘 담장 밖을 서성대던 허기진 영혼을 둥지 속으로 불러왔고, 허공에 떠돌던 욕망의 날개도 차분히 접어야 했다.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생성의 기운이 권태로운 삶에 신선한 충격을 불러왔다. 메마른 가슴은 흥건한 사랑의 물결로 출렁이고, 따스한 온기가 집안 구석구석 안개처럼 자욱하니 웃음꽃이 만발하다.
하루의 대부분을 그와 나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낸다. 이제 첫돌을 맞이한 꼬마친구, 그의 눈에 비치는 세상 사물은 모두가 낯설기만 하다. 하늘 빛, 바람, 풀잎, 저를 있게 한 제 핏줄의 근원지까지. 그래서 그의 투명한 눈망울 속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땅에 뒹구는 먼지 알갱이 하나, 꼬물꼬물 기어가는 벌레 한 마리, 무심히 보아 넘기지 않는다. 손으로 만져보고 입으로 깨물어 보고, 그러다 재미없으면 내 입에까지 넣어주는 인정을 베푼다. 둥근 공처럼 예측할 수 없이 굴러다니는 친구, 나는 잠시도 그 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림자처럼 늘 저와 함께 있는 내 존재를 참으로 편하고 만만한 상대로 여기는 것 같다. 잠시만 제게서 시선을 돌리면 따분하고 불안한지 온갖 투정을 다 부리곤 한다.
독서라도 하려고 책을 펼쳐들면 안경을 빼앗고 책장을 찢어 가는 해찰을 부린다. 원고를 끄적이고 있으면 앉은뱅이 책상 위에 냉큼 올라앉는다. 내 손에서 뺏아든 볼펜을 입에 물고 구겨진 원고지 흔들며 개선장군처럼 생글생글 웃는다. 그럴 때마다 울상을 짓고 엄살을 떨며 '안돼'를 연발하지만 웬일인지 그가 밉지가 않다. 윙크를 한답시고 두 눈을 질끈 감고 천진스레 웃는 모습이 밉기는커녕 깨물고 싶도록 귀엽다.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도 없고 그나마 위로라도 받고 싶어 그의 볼에 얼굴을 들이대며 뽀뽀라도 해 달라면 열에 아홉은 찰싹 따귀부터 올린다. 그러면서 또 생글생글 웃는다. 놀부 마누라한테 밥을 구걸하다 뺨맞은 흥부는 밥주걱에 눌어붙은 밥풀이나 남지, 사랑을 구걸하다 얻어맞는 꼴이라니, 동냥을 못 주면 쪽박이나 깨지 말지.
이럴 땐 친구들 모임에라도 나가 실컷 수다라도 떨고 싶다. 훌쩍 도심을 벗어나 등줄기에 흥건히 땀이 배이도록 험한 산길을 오르고 싶다.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싶고, 골목시장 느긋하게 누비며 입에 맞는 쇼핑도 하고 싶다. 넉넉한 시간 속에 뒹굴 때의 자유가 새록새록 그리워진다.
그래 낮잠이나 벌어두자. 그가 없는 밤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가만히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으면 이번에는 야비한 레슬링 선수로 돌변한다. 배 위에 턱 하니 걸터앉아 발길질을 하고, 얼굴을 할퀴고,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그래도 소죽은 귀신처럼 모른 척 하고 버티는데 '으악' 비장의 무기였다. 어느새 젖꼭지 같은 엄지발가락을 마음껏 물고 늘어지는 게 아닌가, 놀라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앉으니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얌전히 등뒤에 얼굴을 묻고 무지무지 불쌍해 보이는 얼굴로 '어부바' 한다.
일 년 신생의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는 '어부바'이다. 흔히 하는 엄마라든가 아빠라는 단어보다 '어부바'를 더 좋아하는 별난 친구이다. 그는 배가 고파도, 잠이 와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어부바'이다. 어쩌면 땅을 딛고 사는 인간의 한계를 한 차원 극복할 수 있는 실속 있는 언어가 아닐는지.
그와 나는 말이 없다. 그러나 서로의 눈빛으로 상대의 마음을 읽어 낸다. 항상 말이 없는 그는 과묵한 어른 같고, 많은 언어를 부릴 줄 아는 나는 오히려 수다쟁이, 철부지 아이 같다. 엉터리 가사를 동원하여 동요를 부르고, 서툰 몸짓으로 애교까지 떨며 율동을 한다.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이다. 애간장이 녹아나는 그의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 나는 열심히 재롱을 떨고,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놀이를 원한다.
그는 요즘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마를 배우고 있다. 첫발을 옮길 때는 대 우주가 움직이는 듯한 긴장과 경이로움으로 지켜보았다. 두어발 옮기고 쓰러지고, 오뚝이처럼 일어나 서너발 옮기다 또 쓰러진다. 비틀대며 수없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삶에 도전하는 결연한 의지에 나는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길고 먼 인생여정에서 언제나 당당하고 오늘의 순수함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손자 자랑은 돈 내 놓고 해야 된다는 말이 있다. 그와 나 굳이 촌수를 밝히라면 조손(祖孫)지간이다. 이 글을 읽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빚을 지는 느낌도 들고, 팔불출 소리도 듣고 싶지 않으니 그와 난 영원한 친구 사이로 남고 싶다.
五月은 계절의 여왕이다. 보석 중의 보석 다이아몬드가 오월의 보석이고, 꽃중의 꽃 장미가 오월에 핀다. 태양 빛은 한없이 자애롭고, 바람도 감미로운 五月동이 친구여 보석처럼 영원히 빛나고 매혹적인 꽃처럼 아름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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