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함께 / 김동필
나는 수필을 사랑한다. 고백의 문학이요, 자조문학(自照文學)인 수필을 나는 좋아한다. 가을은 빛 바랜 고독과 슬픔을 아른아른 가슴 끝까지 투영시키고 밤비는 부슬부슬 창가를 적시는데 품격을 완미(完美)한 난초 같은 수필 한 대목을 읽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유유자적한 관조의 멋을 사랑하기 때문에 수필을 사랑하는지 모른다. 나는 수필을 쓴다. 수필을 쓰면서 마음의 그릇에 내 인생을 주워담는다. 화려한 동심과 상상으로 채워졌던 먼 날의 추억도 담아가고 수 없는 자책과 원망으로 점철된 세월을 미련 속에 담기도 한다. 물욕으로 범람한 자신을 나무라고 인고(忍苦)의 이랑 속에 구겨진 자화상을 담백하게 토해놓고 왜소해지는 인간에 안타까운 절규를 푸념해 놓기도 한다. 때론 청천백석간(淸泉白石間)에서 시인과 접할 수도 있고, 월하독작(月下獨酌)의 멋에 접할 수도 있고 못나서 나부끼는 내 자신의 가엾은 회향(回向)의 인간적 호소를 담으면서 근원적 삶의 추구와 현실인식의 내면화에 충실할 수도 있다. 글을 쓸 땐 혼자 느끼는 고독이 있다. 대중가요조의 외로움이 동반한 그런 고독은 아니다. 새벽녘에 쌓아 올리던 탑이 보는 이 없어 외롭고, 돕는 자 없어 고달프듯 그런 고독일까? 슬픔이나 외로움을 넘어선 아름다움의 보호를 받는 고독일 것이다. 한 티끌 속에 온갖 세상이 몽땅 담겨 있다는데 세상을 헤쳐 살아가는 진정한 동행자는 자신뿐이다. 출가 수행승(修行僧)의 길이 외롭고 멀어 누구와 동반하지 않고 홀로 가듯이 내 혼자 가는 길이 글을 쓰는 길이다. 글을 쓰는 순간은 가장 고결한 순수성의 정체를 다시 여과하는 지순(至純)의 순간인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이 땐 혼자 생각, 혼자 겨워 그리움이 물든 잔잔한 호수처럼 깊고 조용해진다. 억겁의 함묵(含默)이 자꾸 쌓이고 생명의 문을 열어주는 참과 믿음과 따스한 것의 귀의(歸依)가 있다. 글은 나의 자화상이다. 자아를 바로 비추는 거울이다. 침묵으로 눈처럼 희어 가는 반성과 성찰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돌아보는 시간들이 오죽이나 만족한가? 이런 가운데 글을 통해 현학(현학)의 허세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오염이 없을까 하고 염려 속에 살면 더 다행이리라. 나는 행복하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행복을 남의 눈을 통해 결정지으려는 야릇한 성미에 젖어 있다. 왜 그럴까? 진정한 행복은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천분을 마음껏 발휘하는데 있다. 남한테 팔 눈이 어찌 그리 많을까? 낮은 대로의 실현이지만 주야로 끈질긴 열성과 몰입이 따를 때 삶의 의의와 보람은 찾아지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이던가? 솔로몬이 행복했을까? 아니면 디오니게스가 더 행복했을까? 그것은 가치판단의 문제다. 그러나, 가치판단은 실리적인 판단이나 공리적인 선택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인간의 삶이란 자기만을 위한 것 같지만 실은 자기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아내를 위함도 아니요 아들딸을 위함도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고 창조하기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관조 속에서 생의 의의를 탐색해내고, 뛰고 있는 내 심장의 고통 속에서 생의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산다고 나는 대답할 수 있다. 꽃봉오리 속에 피어난 샴페인의 탄성도 순간이요 천고의 영웅들이 기울인 술잔도 잠깐이었다. 찬란한 것은 순간을 위해 탄생하지만 진실한 것은 후세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없어지지 않고 남는 것이다. 범인은 살기 위해 마침내 자기를 죽이지만 가치를 창조한 위인은 한번 죽음으로써 영원을 산다. 나는 영원을 향해 쓰고 싶다. 영원을 한 톨이나마 먹으며 살고 싶다. 빅톨 위고는 '영국은 셰익스피어와 성서 두 책을 가진 나라인데 셰익스피어는 영국인이 썼지만 성서는 영국을 만든 책이다.'라 했으며, 문호 괴테는 '독일의 위인들과 모든 위대한 것은 마르틴 루터가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덕택이었다.'라고 말했다. '논어를 읽고도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읽지 않는 것과 같다.'라는 정자(程子)의 말을 기억한다. 다 책과 글의 위대함을 노래한 명구들이다. 내가 쓰는 글이 남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 없고 역사의 기록에 너무 못 미치고 나의 숨결이 탈속된 선풍신운(仙風神韻)은 어림없고 사랑의 비명(碑銘)까지도 못 되어도 한 줄의 문구, 한 편의 수필감으로 그 말미에 더러는 설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 그렇다. 철학자도 아닌 명사도 아닌 나 같은 무명초(無名草)가 아니, 미련한 필부가 쓴 글을 누가 읽어 줄 것인가? 현대감각이 풍성한 말로 '웃긴다.'라는 단어가 어울릴지 모른다. 그러나, 안심해도 좋은 것이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아끼고 그리워하는 제자들에게 나눠 읽고픈 가냘픈 소망이 살아 있는 한, 나는 마음 풀고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고고한 기풍, 원숙한 지성미도 원하지 않는다. 내 희미한 개성과 색채를 가지고 큰 폐를 끼치지 않고 살면 된다. 풀벌레의 처량한 울음이 구애의 노래라면 등불 아래 사각사각 글을 써내려 가는 이 작업은 체념과 운명을 신세타령으로 바꾸는 위안만을 겪는 것이라 해도 좋고, 내가 살아 있다는 표백(표백)에 지날 뿐이라도 좋을 것 같다. 글을 쓴다는 원초적 행위는 경건하고 겸허하고 지혜의 뜨락, 진리의 씨앗을 줍는 행위이다. 인간은 저마다의 아름다운 작품을 조각하려는 생의 예술가다. 우리는 착하고 성실한 생명을 새기는 진지한 삶의 예술가가 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전하는 운명으로 살아가는 나, 꾀죄죄한 살림살이에서 헤어나지 못할망정, 어찌 틈을 잃어 유어예(遊於藝)-예술 속에 여유 있게 자적하는 공자의 말을 기억에서 놓칠 수 있겠는가? 야인의 긍지에 흠뻑 취하고 미처 깨닫지 못한 부끄러움에 몸을 털며, 마음의 밭이 황무지였던 걸 다시 일구며 샘물을 길어 올리는 청초한 숨결로 나는 오늘도 써야 한다. 수필은 내 인생의 고백이요 회복이요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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