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면 고물, 주면 보물 / 이 경 담
합정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느라 무료하게 서 있으니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두면 고물, 주면 보물’, 짧은 문장이 마음을 끌었다. 곁들여 구두와 트럼펫이 각기 반쪽은 괴죄죄한데 반쪽은 반짝반짝 빛나는 새 것으로 변한 사진이 매우 인상적이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물품 기증을 독려하는 선전물이다. 간단한 문장과 사진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잘 전하는 훌륭한 광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두면 고물, 주면 보물’이라는 문장은 생각할수록 명언이다. ‘아름다운 가게’는 헌 물건을 기증 받아 싼값으로 팔고, 수익금을 어려운 이웃에게 돌려주는 중고품 가게이다.
새천년 열림과 더불어 직장을 그만두고 바로 시작한 일이 성경공부와 봉사활동이다. 성경공부는 자연스레 성당에 마련된 소규모 모임에서 첫발을 떼었다. 봉사활동은 우연한 기회로 시민단체에서 했다. 어떤 전문 지식을 가지고 참여한 것이 아니었기에 나의 활동은 전화 받기나 자료 정리 등 단순한 데 그쳤으나 사회를 위해 자그마한 보탬이라도 할 수 있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봉사를 하면 얻는 것이 더 많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큰 보람을 느꼈다. 봉사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맡은 바를 하면 되었지만 활동가들은 언제 퇴근하는지 모를 정도로 일에 매달렸다. 나름대로 각 분야에서 전문가인 그들은 젊고 유능하고 성실했다. 박봉에다 어려운 환경에서 일하는 젊은 활동가들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평생을 나를 위해 일하고 돈을 번 자신을 되돌아보며 부끄러웠다. 뿐만 아니라 시민단체의 열악한 살림살이를 보며 작은 도움이라도 더 주고 싶었다.
봉사자 몇이 모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골똘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바자회를 한번 열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알뜰시장을 열고자 하니 관심을 가진 이는 누구나 모월 모일 모시에 어디로 나오라’는 간략한 글을 회원 게시판에 올렸다. 드디어 모이는 날이다. 회의를 마치고 운현궁 뜰 화사한 모란꽃 앞에서 사진을 찍은 걸 보면 늦은 봄이었나 보다. 총 네 명이 나왔다. 이렇게 관심이 없어서야 무슨 일을 하겠느냐며 나는 타박을 하는데 한 봉사자가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 했는데, 넷이나 모였으니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 소라도 잡겠다.”라며 용기를 북돋우었다.
알뜰시장이 열렸다. 시민단체 사무실이 들어가 있는 건물의 현관과 그 앞 인도였다. 물건을 진열하고 가격표를 붙이고 찾아온 회원들과 환담을 나누고 손님을 부르니 그곳이 금세 법석대는 장터가 되었다. 봉사자들은 그간 각자 집안에서 기증할 만한 것들을 찾아내 가져오기 여념 없었다. 적극적인 회원들은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파는 가방, 셔츠, 주방용품들을 가져오기도 하고 도자기와 그릇 등 귀한 물건을 내놓았으며 꽃가게에선 앙증맞은 화분을 가져와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다. 처음엔 장롱에서 옷을 골라 잔뜩 쌓아두었다가 곧 마음이 변해 도로 집어넣고 꺼내기를 몇 차례 번복했다는 솔직한 말을 들으며 깔깔 웃기도 했다. 누구나 다 마음이 그러했던 것이다. 망설임 끝에 내놓은 물건들을 보며 아쉬움과 후련함이 교차했다. 비록 쓰이지 않는 것들이라 해도 내 물건을 포기하는 건 쉽지 않았다. 정말 두 눈 꼭 감고 과감하게 마음을 버려야 했다. 그 과정을 통해 아까운 것을 내어주는 마음을 배우고 주고 나서 얻는 기쁨도 알았다. 버리는 후련함은 통쾌하기조차 했다.
사람들이 붐비는 인사동과 가까워서인지 장사가 잘 되었다. 봉사자들은 허리에 주머니를 차고 종일 돈을 모았다. 난 원래 책을 팔기로 했는데 판매대에 올려진 책을 보며 자꾸 개인적인 욕심이 생겨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옷을 팔았다. 장사가 꽤 재미있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물론 어떤 값으로 팔든 밑지는 법 없으니 속상할 일도 없다. 무엇보다 기쁜 건 햇빛도 구경 못하고 처박혀 있던 물건들이 제대로 주인을 만나는 거였다. 나에겐 별 쓸모없던 것이 누구에겐가 소중한 것이 되어 떠나는 게 신기하고 즐거웠다. 내가 내놓은 선명한 하늘색과 진홍 바탕에 페이즐리 무늬가 찍힌 인도산 실크 스카프는 초반에 팔려 나갔다. 검정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자신의 목에 둘러보더니 두 개를 다 손에 넣었다. 내 스카프를 두른 여인이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당장 도로 달라고 싶었다. 화려한 색상이라 한두 번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간직하고만 있었는데도 말이다. 나를 떠나간 이국적인 스카프가 지금까지도 살짝 아쉬운 마음으로 남아 있다. 그래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점차 봉사자들과 주변 사람들의 옷장 그릇장 신발장 책장 등은 조금씩이나마 숨통을 틔우듯이 공간이 생기며 그 빈 곳은 흐뭇함으로 채워져 나갔다.
겨우 닷새 동안 준비해서 치룬 알뜰시장이 의외로 성황리에 끝났다. 그날 우리가 얼마를 벌었던지 숫자는 잊어버렸지만 매우 흡족했고 주위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다. 재미를 본 우리는 다음엔 두어 달 후, 그 다음엔 한 달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드디어 상설 가게를 열기에 이르렀다. 가게를 열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중고품을 사는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가는 곳으로 만들어 중고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거였다. 중고품 가게는 으레 허름한 창고 같은 곳이라는 기존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알뜰시장에서 벗어나 어엿한 가게로 커가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거들었다. ‘아름다운 가게 1호점’ 은 안국동에 생겼다.
이제 ‘아름다운 가게’가 생긴 지 10여 년, 비록 초창기 봉사자들에겐 추억의 장소가 된 지금이나 전국 어디에서나 ‘아름다운 가게’라는 이름을 붙인 깔끔한 가게를 보면 반갑다. 연전에 제주도 중문단지 바닷가에 갔다가 ‘아름다운 가게’를 보고 나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호텔 정원 한 켠에 자리 잡은 아담한 가게는 중고품을 파는 곳이라기보다는 예쁜 카페 같은 분위기였다. 앞으로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잘 가꾼 정원수와 꽃들을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넘치는 풍요로움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소박한 중고품 가게, ‘아름다운 가게’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눈길을 보낼 수 있다면 마음속에 작은 꽃 씨앗이 심어질 것이다.
‘두면 고물, 주면 보물’, 이 짧은 글귀를 음미하며 내 마음에 보물 하나 간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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