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움과 없음
한상렬
세한도歲寒圖를 본다. “날이 추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의 푸르름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던가. 그림은 지극히 간결하고 단아하다. 하얀 눈과 소나무의 푸르름. 권세가 있을 때는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사람들이 처지가 어려워지자 모두 외면하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그는 비로소 권력의 무상함을 느꼈는가. 그때 이 그림은 완성되었다. 유배지는 그를 예술가로 키워낸 비옥한 땅이었다. 다시금 그림을 본다. 그림 속에는 그가 비우려 했던 삶이 묻어나온다. 비움인가. 없음인가.
노자의 <도덕경> 63장을 뒤적인다. “위무위, 사무사, 미무미爲無爲, 事無事, 味無味”라는 구절이 나온다. 풀어보면 “무위를 하고, 무사를 일삼고, 무미를 맛있게 여기고…”란 말이겠다. 없는 것이 아니라, ‘없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없음을 잘 활용하자는 말이지 싶다. 여기 ‘없음’은 ‘비움’과도 통한다. 그래서 노자는 일찍이 ‘없음’과 ‘비움’을 등식으로 놓고 설파하였는지도 모른다. 말할 것도 없이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하고 있다. 이는 곧 없음과 비움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를 말함이리라.
다시 <도덕경> 11장에는 읽는다. “삼십폭공일곡, 당기무, 유차지용 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 착호상이위실, 당기무, 유실지용, 고유지이위이, 무지이위용.三十輻共一穀, 當其無, 有車之用 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 鑿戶爽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이라 했다. 비어 있거나 아무 것도 없는 것도 그 자체로 쓰임새가 있다는 것을 의미함이겠다. 의역하면 “수레바퀴 30개가 바퀴통에 모여 있는 것은 바퀴통이 원래 가운데가 뻥 뚫린 빈공간이기 때문이다. 옹기그릇이 그릇으로 쓰이는 것도 속이 비어 있어서이며, 집을 짓고 문을 만들지만 결국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그 안이 비어 있어서이다. 무릇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이롭게 쓰이는 것은 비어 있거나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결국 ‘없음’과 ‘비어 있음’은 매한가지라는 말이겠다.
비어 있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그림이다. 그래 우리 전통예술에서 ‘비움’이나 ‘없음’은 미학적으로 보아 고도의 미적감수성이다. 동양화를 보면 그 미가 여백에서 우러나옴을 쉽게 간파하게 한다. 꽉 차여져 있음이 아니라, 적당히 비워둠으로써 미적 경지에 이른다. 어찌 미술에서만 그러하랴.
음악에서도 없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그림이다. 사물놀이나 농악에서 절정의 순간은 바로 ‘없음’이다. 절정의 순간, 음악이 잠시 멈추어지고 순간적인 침묵의 시간이 이어진다. 그렇다. 여기 침묵은 바로 없음이요, 비움이다. 그러나 침묵은 분명 연주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쉬는 것이 아니라, 잠시의 휴식이요, 다음을 예비하기 위한 동작일 뿐이다.
주5일제가 시작되었다. 대기업에서부터 시작하여 공무원이 이를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초 ․ 중 ․ 고등학교도 4주째 토요일은 수업을 하지 않는다. 2006년도부터 한달에 두 번 주5일제가 실시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아이들이 갈 곳이 없어 방황한다고 걱정하더니 이젠 그런 말도 사라진 듯하다. 일년 동안의 예행연습이 어느 정도 정착되어 가는가 보다. 물론 노는 날이 늘어났으니 전혀 문제가 없을 리는 없다. 여가를 즐기는 일은 경제적인 부담이 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 하루의 쉼이 내일을 위한 충전에 효과적으로 활용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주 5일제가 실시되면서 토요일의 개념이 금요일로 바뀌면서 생활 패턴이 이에 걸맞게 변화해 간다. 금요일 모임이 잦아지고 토요일 오전부터 고속도로는 밀리기 시작한다. 여행 상품도 이에 맞게 짜여지고, 다양한 휴식공간과 테마파크들이 늘어간다. 11월의 마지막 주에 설악산엘 다녀왔다. 이미 가을 단풍철도 지났건만 상행길이 꽉 막혀 교통체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닷새 일하고 이틀을 쉬는 생활 패턴이 바로 ‘주5일 근무제’이다. 이를 두고 놀기 좋아하는 민족이라 말할 것인가? 하긴 시행 초기 생산성 저하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높지 않았던가. 그러나 뒤집어 보면 노는 것은 그저 노는 것이 아니라, ‘비워 둠’일 뿐이다. 빡빡한 일과에 시달리느니 비워 둠으로써 생산성 향상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동안 얼마나 분주하게 살아왔는가. 근무 시간에 비례한 생산성의 판단은 어찌 보면 더 큰 손실을 초래하는 일일 수도 있다. 신체 균형을 무시한 ‘빨리빨리’의 서둠만이 왕도는 아닐 것이다. 조국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노동력의 무한한 제공은 가까이 보면 생산성을 진작시켰을지 모르지만, 멀리 보면 오히려 생산성 저하를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그래 휴식은 그저 비워두는 시간이 아니라 경쟁력의 충족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휴식은 비움이요, 없음이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무가치한 비움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충전의 시간이 바로 휴식일 것이다.
‘없음’의 개념이 수학적으로 이해된 것은 기원후 5세기경부터라고 한다. 노자의 시대로 보면 그 후 1000년이 흐른 뒤일 것이다. 인도인들은 숫자개념에서 영零을 하나, 둘 …하는 식의 숫자 외에 ‘없음’을 뜻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영, 1. 2. 3, 4…’의 순으로 숫자를 사용했다. 여기서 ‘영’은 물론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개념 파악의 인식이 아라비아를 통해 로마로 건너갔고 0의 도입으로 인해 수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자. 이제 주5일제가 정착되어 간다. 노는 날이 많아졌으니 생산력 저하를 어찌할까 걱정할 것인가? 그렇게 놀다 언제 공부 하겠느냐고 걱정하랴. 아니다. 일주일에 5일을 일한다고 하지 말고, 일주일에 이틀을 쉰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오히려 더욱 생산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비움은 어쩌면 욕심을 부려놓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 일이 되기도 한다. 어차피 빈 몸으로 와 빈 몸으로 갈 인생이 아니던가. 그러니 과욕은 자신을 해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여 비워둠은 마음의 평안을 찾는 일이지 싶다.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일하기 위해, 노동을 위해 사는가? 아니다. 잘 일하고, 잘 쉬고 행복하기 위해 사는 건 아닐까. 어찌 ‘비움’과 ‘없음’을 동양화 화폭에서만 찾을 일인가. ‘비움’과 ‘없음’은 미학이다.
(『수필세계』, 2007-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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