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자 보는 풍경 -
청호
아침이면 마당에 나가서 꽃과 인사를 하는 것이 일과이다.
초봄에 노루귀와 복수초가 피기 시작하면 초겨울까지 자주 달개비나 공작초, 동국(冬菊) 까지 끊이지 않고 피어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며 친구이다.
꽃을 심으려고 자리를 정할 때는 담 밖에서 보이는 풍경을 그려본다. 대외적인 일에 소극적이며, 다른 사람에게 그다지 베풀고 살지도 못한다. 내가 가꾼 꽃이라도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한다. 길 쪽으로 매화를 심었더니 봄이면 향기가 뒷산에 까지 풍겨 오더라고 지나가는 사람이 말해 주었다. 줄기가 긴 인동초, 꽃대가 쑥 올라오는 나리와 원추리는 담 너머로 보이게 심었다.
그 중에 가장 사람들이 좋아하는 꽃은 능소화이다. 1994년 암자를 지은 이듬해 묘목을 담 아래 심었다. 십 년이 지나자 가지마다 송이송이 너울진 꽃은 더운 날씨에 맞는 청량한 기쁨이다. 지나가는 등산객 중에 얼굴이 마주치면 꽃을 가리키며 한 여름동안 잘 보았다는 인사도 여러 번 들었다. 능소화는 한창 무렵에 고운 꽃송이가 뚝 뚝 떨어져 보는 사람의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옛 사람들은 죽음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의 기개에 비유하여 ‘양반 꽃’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육신의 충의와 을사늑약 같은 불가항력에 자결한 불굴의 정신을 보는 것 같다. 얼마 전 꽃처럼 마음이 예쁜 사람을 보았다. 길 가에 심어 둔 철쭉 가지에 때 아닌 꽃이 피었기에 가까이 가 보았더니 능소화였다. 떨어진 송이가 너무 애처러웠던지 지나가던 사람이 철쭉 가지에 올려 둔 것이었다. 누군가 지고 난 꽃으로 내게 준 선물이었다.
현대인들은 아파트에 많이 살고 있다. 우리 절에 오는 신도들도 대부분 그렇다.
절에 핀 꽃으로 자연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누구나 법당에 들어오기 전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마당부터 꼭 한 바퀴 둘러보고 좋아한다.
정원의 아름다움을 다 보여 주려고 애를 쓰지만, 키우는 나만이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른 가지 겨울눈에 머무는 이른 봄 햇살.
봉오리가 열리기를 기다리던 끝에 피우는 첫 송이.
여름이 시작되어 밤새 쉬고 아침에 이슬을 머금은 원추리와 호박꽃.
오전에 막 피는 연꽃과 수련.
해거름에 피며, 초가 마당이 연상되는 하얀 박꽃과 분꽃.
7월 초순부터 밭에 흰색과 보라색으로 이른 아침을 상쾌하게 만드는 도라지꽃.
해질녘 서늘한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구절초 무리와 보랏빛 층층꽃.
‘꽤액, 꽥’하는 소리에 어리둥절했다가 웃게 만드는 노루울음.
겨울 빈 정원에 눈꽃이 핀 고요함을 울리는 풍경소리.
이러한 정경은 방문객이 오는 시간에는 볼 수 없어서 살고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함께 보고 싶어 떠오르는 모습도 있지만, 어디에나 다 있는 것이려니 하며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혼자 본다는 것은, 풀을 매거나 꽃을 옮기는 일 역시 혼자 해야 한다는 뜻이다. 절이라서 신도가 일을 함께 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내가 사는 암자는 신도가 많지도 않거니와, 아파트에서 화분이나 키우는 사람에게 삽이나 호미질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꼭 필요하여, 손에 익히려는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또 한낮의 햇볕이 뜨거워지는 계절이 시작되면, 해가 뜨기 전이나 해질녘에 일을 해야 한다. 그 시간은 사람들이 집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다.
일 년에 몇 번 가는 정형외과에 손가락이 아파서 갔더니 의사가 거친 손을 보고 놀랐다. ‘여자 손이 남자인 자기보다 더 거칠다’고 한 마디 했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중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일을 많이 해서 병이 났으니 일을 좀 줄이라고 하였다. 산다는 것은 일을 떠나서는 하루도 살 수 없지만 조심은 하기로 했다. 미인은 관리비가 많이 든다는 우스갯말이 있듯, 아름다움은 몸으로 치르는 값이 있다.
오늘, 빨간 배롱나무 활짝 핀 꽃을 보며 차를 마셨다. 가지에 지난해의 묵은 껍질이 벗겨지며, 매끈하고 흰 속살이 드러나고 있었다. 배롱나무는 어느 정도 자라면 해마다 지난해의 껍질이 벗겨진다. 마치 사람이 각자 어딘가에 집착을 하다가, 결국 놓아야 하는 것을 알아 가는 모습 같았다. 어려서는 장난감, 더 커서는 사랑을, 나이가 더 들면 명예나 돈. 그 때마다 나름대로 가지려 애써 보기도 하고, 스스로 벗어나려는 성숙함도 있다. 없는 것을 필요한 만큼 가지려는 것이나 가진 것에 집착을 하지 않으면, 번뇌가 아니라 삶의 순리일 따름이다.
나무의 묵은 껍질이 벗겨져 나가듯 내 번뇌의 한 껍질도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며 방으로 들어 왔다.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은 마음으로 가꾸었지만, 나 혼자 보는 풍경도 있다.
공을 들인 사람에겐, 공들인 만큼 얻는 것이 어디에나 변함없는 세상의 이치이다. 무자 6.19
청호 스님 ( 수필가 )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의상학과 졸업
동대학교 대학원 사범대학 가정학과 석사 졸업
1986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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