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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길이 열리는 날 - 황정순
달님이 바다를 점령하는 날 , 바다는 길을 내주며 쩍 열렸다. 하늘과 땅의 모습처럼 영원히 풀어 줄 것 같지 않던 바다는 앞섶을 풀어 헤쳤다. 음력 ‘보름’ 과 ‘그믐’ 이다. 바닷가 사람들은 이 때를 가리켜 ‘보름사리 ’ ‘그믐사리’ 라고 부른다. 바다가 열리는 비밀스런 시간은 단 두 시간정도이다. 그 거룩한 바다도 ‘사리’ 때가 되면 달님을 만나러 가는지 꽉 여문 비밀의 문을 열어젖힌다.
40억년 동안 이어온 우주가 허락한 날 ,하루에 두 차례 달님과 바다의 만남이 있어서 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날이다. 그 날 달님은 선녀의 옷을 감추듯 바다의 푸른 옷을 살짝 벗겨 간다. 사람들은 이 길을 신비의 바닷길이라고 부른다. 그 길은 바닷속 궁전의 용왕을 만나러가는 길 인양 신비스럽다. 검푸른 바다위의 한 점으로 떠 있던 무창포 앞바다의 섬 ‘석대도’ 까지 길을 내준다.
바닷길은 수많은 생명들이 젖줄을 찾아 오르내렸던 앞가슴길이다. 풀어헤친 앞 섶 안에는 바다의 비밀스런 모습들이 드러난다. 그 푸르고 웅장하고 낭만적이며 때로는 무섭기도 한 바다 속에 바위와 고동 , 성게와 소라, 낙지와 따개비등 각종 해초들, 수많은 바다 생물들이 바다에 몸을 의지하며 살아 왔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갯강구 , 쏙, 맛살, 갯비틀이고둥이가 내뱉는 생명의 소리와 꼼지락거리는 모양, 주둥이를 비비적거리는 보잘 것 없는 작은 소리들이 갯벌이나 바위틈새에서 들려오고 있다. 태고 적 숨소리가 저러 했을까. 아기가 엄마 젖을 빨다가 잠시 놓쳐버린양 헛입질짓하는 소리가 저리 들릴까.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아름다운 소리들이다.
그러고 보면 바다는 그동안 분명 어머니였다. 작은 생명체들로부터 커다란 고래와 상어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몸에 붙어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바다생물들에게 젖줄을 내어주며 보듬어서 키워 왔던 것이다.
낮의 바다가 찬란한 무늬라면 밤의 바다는 암흑의 세계이다. 노역 질하는 파도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어둠 속에서 바닷물은 끊임없이 당겼다 놓기를 반복한다. 힘에 부친 바닷물은 더 큰 바닷물에게 끌려가고서야 비로소 바닷길을 허락한다.
밤 바다가 열리는 날은 손전등이나 석유를 먹인 솜방망이 불을 들고 들어가는데 , 이때는 야간 전투를 방불케 한다. 사람들은 그 길을 따라서 수백 개의 불빛이 되어 흘러 들어간다. 불빛은 곧 점이 된다. 바다는 이 점들을 깊숙이 빨아들이다 .어딘지 모르게 비밀스런 곳으로 안내하는 듯하다. 그곳에는 비밀스런 냄새가 있다. 비릿하면서도 무엇인가 종잡을 수 없는 그 비밀스런 바다냄새는 신비감을 더해준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새로운 생명을 빨아들이듯 바다는 가장 빨리 도착한 사람에게 가장 좋은 곳의 자리를 내준다. 수백 년을 꼼짝 않고 박혀있던 해초가 돋아있는 돌들을 뒤집거나 그 주변을 더듬어 게를 잡기 시작한다. 게들은 사람들이 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으스름달밤 사랑놀이에 빠져 있다. 달빛아래 낮은 물밑에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놈이다. 박하지(민꽃게) 게다. 손전등을 바짝 치켜드니 어리둥절하여 갈 길을 잃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등짝을 가볍게 잡아야만 한다. 멋모르고 게의 배 부분까지 덥석 움켜쥐었다가는 게의 집게발에 물려 비명을 지를 수도 있다. 한 번 물리면 쉽게 놓아 주지 않고 몇 번 손아귀의 힘을 거부하고서야 놓아주기 때문이다. 천둥소리가 들려야 놓아 준다고 해서 천둥게라는 별명을 달고 다니기도 한다. 그놈들은 얼마나 짙은 사랑을하길래 ,달 밝은 보름사리에 건져 올린 게는 허벅지 살이 다 빠져 먹을 것이 없다고 투덜거릴까.
그 사이사이에 조개를 캐기도 한다. 조개의 먹이는 바닷물 속에 있다. 바닷물은 어머니가 차려준 조개들의 밥상이다. 조개들이라고 해서 편식을 하지 않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넓은 갯벌위에 조개가 다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네 사람처럼 맛있는 먹을거리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 듯이 조개들도 살기 좋고 먹을거리가 풍부한 곳에 무리를 지어 모여 산다.
갯벌이나 모래 속에 묻힌 조개들도 오줌을 싸는지 때로는 ‘찍’하고 쥐 오줌을 갈기듯 물을 갈겨대기도 한다. 그것은 조개가 벌어진 입을 다물 때 내뱉는 물줄기이자 숨구멍이다. 그렇다고 갯벌위의 점박이처럼 늘어선 수억만 개의 구멍이 다 조개구멍이란 말은 아니다. 그 구멍 중에서도 조개 구멍을 잘 찾아내는 사람이 조개를 많이 잡을 수 있다.
어느 순간 먹거리를 잡는 재미에 푹 빠지거나 많이 잡을 욕심으로 썰물을 따라 쭉 들어가다 보면 해안으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는 조심해야 한다. 썰물이 밀물로 되돌아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닷물이라는 것이 나간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갯벌 위에는 갯장어의 꼬리마냥 갯고랑이 있기 마련이다. 갯벌의 육화된 흙비늘을 털어내어 바다로 내보내는 길이다. 그 물길을 타고 밀물이 몰려와 사람보다 앞서 문 앞을 가로막는 수가 있다.
갯것을 들고 무거운 몸으로 바닷길을 빠져 나오다 보면 밀물은 썰물보다 빠르게 들어온다. 바다는 벗겨진 앞섶을 급히 여미려는 듯 어느새 내 뒤에서 푸르게 출렁이고 있다.
바다는 달님을 만나고 돌아온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아직도 상기된 모습이다. 먼 길을 다녀온 탓인지 숨이 차 헐떡이는 듯도 하다. 그 짧은 달님과의 만남이 아쉬웠을 것이다. 다시 보름 후를 기약했겠지. 바다는 앞섶을 오르내리는 새끼들에게 제 때에 젖줄을 내 주어야 하기에 급히 되돌아 왔을 것이다.
바닷물의 비릿한 냄새와 숨소리에 갯펄과 바위틈에 숨어들었던 어린 생명들이 어미 품안을 찾듯이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바다는 금새 어린것들의 목을 축축하게 적셔주며 잠시 비워두었던 시간이 안쓰러운 듯 보듬는다. 새들도 날아와 조금 남은 갯벌위에서 먹이를 찾는다. 푸르고 억센 물결위에 다시 섬이 떠 있다. 넘실대는 바다는 앞섶을 꽉 조여 맨다.
돌아서는 내게 바다는 더 큰 가슴으로 말을 한다. 사람만이 사랑을 하고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며 세상 만물의 이치는 같은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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