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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珍 박 기 옥
우수 경칩이 지나니 새벽 공기가 사뭇 다르다. 바람은 아직 차지만 이미 독을 잃었다. 안개 사이로 비밀스럽게 향긋한 것이 밀려온다. 발밑으로 흙이 살짝 풀어져 있음이 느껴진다. 땅 속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음이 틀림없다. 겨우내 굳게 얼었던 흙 속의 물이 녹으면서 그 틈으로 햇살이 들어간 모양이다. 잠들었던 개구리를 깨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뱀이 눈 뜨고, 싹들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봄기운이 사찰을 찾게 하는가. 차를 몰아 증산재를 넘어 청암사로 향한다. 불영산 기슭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신라 고찰이다. 울창한 숲을 끼고 계곡을 따르다가 불영동천(佛靈洞天)의 맑은 물소리에 차를 세운다. 천년의 비바람 속에서 세속의 풍진을 씻어버린 고찰이 이제는 동천의 바위와 더불어 자연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독경소리 마저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와 다를 바 없다.
절 입구에서 우비천(牛鼻泉) 샘물을 한 모금 마셔본다. 소가 누운 형상에서 코를 통해 나오는 물이다. 이 물을 마시면 부자가 된다는 전설이 있다. 옛 선비들은 이 샘을 지날 때 부채로 눈을 가렸다고 한다. 물질적 유혹을 피하기 위함이리라.
선비도 아니고 눈 가릴 부채도 없는 나는 물 한 조롱박만 마시기로 한다. 살면서 딱 지금 만큼만, 꾸러가지 않을 정도만 주십사 기원한다. 샘가의 산수유나무가 나의 마음을 엿보고 미소 짓는다.
작은 다리를 가로질러 다시 촘촘한 돌계단을 밟는다. 청암사의 본채가 한 눈에 들어온다. 잔설이 남아있는 경내는 산 새 몇 마리가 먹이를 쪼고 있을 뿐 고요하다. 봄볕이 곰실거리며 뜰을 간질이는데,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들을 집적이고 간다. 처마 끝의 풍경이 몸을 흔든다.
팔각지붕을 갖춘 대웅전에 오르니 뒤뜰 옆에서 작은 손짓이 느껴진다. 매화나무이다. 이제 마악 봄을 향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매화는 매서운 한 겨울의 추위를 뚫고 고고하게 꽃망울을 터뜨려서 사랑을 받는다고 하지 않던가. 개나리 진달래와 동격일 수 없는 까닭이다.
암자 쪽에서 어린 비구니스님이 종종 걸음으로 오는 것이 보인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스님의 상기된 표정에서 순백의 매화가 피어난다.
숨을 깊이 들이쉬며 사찰 특유의 정취를 맡아본다. 무색무취의 싸아한 공기가 머릿속을 맑게 한다. 내 속의 탁기가 청정한 기운으로 순화되는 느낌이다. 법당 안에서는 석가모니불을 염불하는 소리가 허공을 울린다. 불자도 아닌 나는 방해가 될까봐 조용히 발길을 돌린다.
보광전 앞의 단풍나무에 눈이 머문다. 지난 가을 미처 떨어지지 못한 잎이 도르르 말린 채 나무 끝에 매달려 있다. 겨우내 그 센 바람, 눈과 비를 견뎌온 나무이다. 수령 또한 백년은 족히 넘었으리라. 나무의 몸통이 뒤틀리고 층지고, 상처투성이다. 상처가 만드는 아름다움에는 서늘한 위엄이 느껴진다.
손을 들어 가만히 나무를 쓸어본다. ‘아파요 --’ 여린 울림이 몸속으로 전해온다. 아픈 것이 너 하나뿐이겠느냐. 싹을 틔우기 위해 산고의 진통을 앓는 저 나무들과 풀꽃 또한 아프다. 뿌리에서부터 물이 올라와 가지 끝까지 전해지려면 수 억 톤의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 엄청난 힘으로 세상에서 가장 여리고 작은 싹을 틔우는구나.
환영일까. 착각일까. 해묵은 단풍나무에서 연두색 당의를 차려 입은 여인이 보인다. 인현 왕후이다. 숙종 15년 장희빈의 모략으로 폐위 당해 이곳 보광전에서 3년간 눈물의 세월을 보냈다. 마침내 복위되어 환궁차비를 하는 중이다. 왕후에게도 봄이 찾아온 것이다.
“아니 되옵니다, 폐하. 신첩의 말씀 좀 들어주시옵소서.”
깜짝 놀라 돌아보니 장희빈이 땅에 엎드려 있다. 소복 차림에 긴 머리는 풀어 헤쳤다. 사약을 마신 후라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다. 세자가 울며불며 어미를 살려 달라고 임금에게 애원한다. 세자는 필사적이고, 임금은 냉정하다. 장희빈의 독기가 아들에게서‘남성’을 빼앗았다는 순간이다. 인간의 증오는 어디까지 가는 것일까.
인간이건 사물이건 그 생성 안에 이미 소멸을 품고 있는 지도 모른다. 피는 꽃과 지는 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피던 꽃이 언젠가는 지는 것이다, 영광과 몰락에 앞, 뒤가 있지 않을 터이니 사랑과 증오 또한 그러하리라.
두 여인에게 소박한 삶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평탄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쩌랴. 사는 동안 정작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몇 안 되는 것을. 평탄해 보이는 삶 또한 그 속에 무수한 굴곡과 명암이 있지 않던가. 삶이 곧 고해(苦海)라고 하지 않던가.
절에서 나와 차에 오르니 불영산에 노을이 물들고 있다. 알아주는 이 없이 저 스스로 저리 곱게 물듦이 새삼 경이롭다. 저 노을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번뇌의 시간이 흘렀을 것인가. 돌아서는 등 뒤로 대웅전에서 올리는 저녁 예불소리가 편안하다.
- 수필세계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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