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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숲에서
金相芬
‘천년의 숲, 상림’을 올해도 걷는다.
한 여름의 녹음으로 이어진 기나긴 터널에서 사랑의 나무 연리목(連理木)을 찾으며……. 한두 해도 아니고, 일이십년도 아닌 천년의 세월동안 다듬어진 숲길을. 숲의 나무들은 한 자리에 서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잎을 키워낸다. 그렇게 살아온 날들의 사연들이 검푸른 숲을 이루어 덮었다.
누가 나무들을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라 했을까. 어떻게 식물은 동물과는 달리 움직이지 못한다 했을까. 그들도 움직인다. 아주 큰 몸동작으로 움직인다.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며 튼튼한 자리매김을 하는 고된 몸짓을 땅위에서는 그 누구도 볼 수 없을 뿐이다. 수분을 끌어올리고 양분을 빨아올리는 큰 뿌리, 작은 뿌리, 머리카락 같은 미세한 뿌리들의 쉬지 않는 움직임들을……. 뿌리에서 끌어올린 수분과 양분은 줄기를 통해 수관(樹冠)으로 옮겨진다. 나뭇가지마다, 잎새마다 골고르게 나눔을 계속한다. 잎눈이 트고, 꽃눈이 트고, 터지는 꽃망울에 힘을 모으며 커지는 잎새마다 양분을 나른다.
겨우내 해묵었던 땅속의 정기를 봄내 빨아올린 나무는 여름햇살을 머금고 단비로 목을 축이며 그 줄기를 굵고 튼튼하게 키운다.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잎으로 가던 흐름은 햇빛과 바람과 빗방울로 빚어낸 양분을 다시 줄기를 통해 뿌리로 되돌려 보내며 나이테를 만들어 간다. 흙에서 얻은 양분을 다시 흙으로 보낼 줄 안다. 어찌하여 그들을 움직이지 않는 식물이라 했을까?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이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의 터전을 일구어 간다.
넓은 수관을 받들고 있는 줄기의 힘은 온 우주를 떠받드는 기량이다. 한해, 또 한해 그려가는 나이테는 옹이진 마디마다 굽이굽이 험난했던 삶의 자취를 남긴다. 그들은 움직인다. 보이지 않게, 말없이 크게 움직인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 새싹을 밀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온힘을 다 모은다. 엄동설한에 나목(裸木)으로 북풍에 떨었고, 온 산천이 설국(雪國)으로 바뀌면 하얀 솜이불 덮고 잠이 드는 듯 했지만, 그들은 결코 잠들 수 없었다. 가지를 떨며, 바람에 흔들리는 대로, 땅속의 뿌리에게 애원했을 것이다. 나를 잡아달라고, 내 몸이 쓰러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깊은 뿌리를 내려달라고.
나무마다 안고 있는 깊은 사연들이 들리는 것 같아 가만가만 발자국을 옮긴다. 드디어 연리목이 나타난다.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한 나무가 되었다.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 나란히 서 있어야할 두 나무의 줄기가 하나로 합해진 연리목.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의 나무’라고 부른다. 백년해로하는, 죽어서도 천년의 사랑을 이어가는 부부의 나무라 해도 좋을까? 합혼수(合婚樹)라는 별명의 자귀나무 또한 금슬 좋은 부부를 뜻하지만, 자고 나면 빛바래는 분홍색 꽃잎에 비하랴. 서로 다른 뿌리에서 한 나무를 이루었어도 두 나무의 개성은 보존되어 서로 다른 잎을 달고 있다. 한쪽은 느티나무 잎이 또 다른 한쪽은 개서어나무의 잎이 각기 다른 모양새의 가지와 잎을 달고 평화롭게 살아간다. 아마도 느티나무는 온갖 힘을 다해 빨아올린 영양분을 개서어나무에게 올려주었고, 개서어나무는 그에 보답하듯이 느티나무에 사랑의 묘약을 전해주지 않았을까. 그렇게 그들은 한 몸이 되었을 것이다. 한 해, 두 해 굵어가는 나이테만큼 쌓여진 그들의 위대한 사랑의 힘을 다시 한 번 우러러보며 발걸음을 옮긴다. 한 자리에서, 어두우면 어두운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견디어가며 세월을 이겨낸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을 배우며, 어둑한 숲길을 걸어간다. 그렇게 ‘천년의 숲, 상림’을 또 다시 걸어본다.
김상분 수필가
수필집 『류시의 작은 정원』
- 2010년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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