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 손정란
어렸을 적 겨울 방학이면 나무를 하기 위해 많은 산을 오르내렸다. 아주 먼 곳까지 가서 나무를 할 때도 있었다.
나뭇짐을 머리에 이고 산길을 걸어야 하는데,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산길은 어른 손바닥 넓이 만큼 좁았다. 발을 헛디디기만 하면 바로 낭떠러지로 떨어질 판이라 다리가 절로 후들거렸다.
머리에서 무거운 나뭇짐이 내리누름으로써 정수리와 양쪽 귀를 위에서 수직으로 잡아 당기는 것처럼 곧게 걸어야 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당당하다 못해 존엄한 걸음걸이이다.
그 아슬아슬한 비탈진 길을 많이 걸었던 탓에 넓은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것보다 좁은 골목길을 걷는 것이 더 편하다. 다만 양손에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았을 때를 말한다.
김동인의 단편 ‘배따라기’에는 주인공이 살아 있는 한 탐색이 계속되어야 하는 숙명의 길이 나타나 있다. 즉, 형수가 물에 빠져 죽은 데 대해 형에게 원망을 품고 떠나가는 아우의 육로는 구도자의 고행길이요, 형이 찾아 나서는 뱃길은 아내의 죽음에 대한 속죄의 길로서 여기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음을 암시하는 숙명이 표현되어 있다.
역사 문헌에서 길은 ‘도로(道路)’ 또는 ‘도(道)’나 ‘노(路)’ 등 한자어로 표현되어 있다. 물론 우리말 길도 도로이지만 관념상으로는 이미지가 다르다. 우리말로 길이라 하면, 좀더 자연스런 통로를 연상하는 데 비해 도로라 하면 신작로 이후 사람의 힘(손)으로 바꾸어 놓은 정비된 일정한 규정에 들어맞는 격식의 길을 연상한다. 국어 사전에도 도로는 ‘사람이나 차들이 편히 다닐 수 있도록 만든 비교적 큰 길’로 주석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는 길(路)을 따라 걷는 것을 좋아한다. 유원지의 맑고 한적한 길과 덩치 큰 트럭과 버스들이 달리는 가로수 잎사귀가 공해에 검게 찌든 간선도로, 좁은 시장 골목, 변두리 어촌에서 바다로 가는 뙤약볕 아래 누런 길, 쇠똥이 퍼져 있는 논둑 길, 조개 껍질들이 하얗게 띠를 두른 해변 모래 길, 철길을 따라 나 있는 도시 뒷길이나 높은 축대 위의 길, 화장터에 이르는 무덤 사이 길, 계곡과 하천을 따라가는 길과 시외버스에서 내려 무턱대고 걷게 되는 낯선 소읍의 단층 상점거리, 작은 상점 하나와 플라타너스 한 그루와 커피 자판기 한 대가 서 있는 어느 소읍의 삼거리에서, 택시 한 대가 길을 잘못 들었는지 차를 돌려 나가는 새로운 길.
길을 걷는 것은 행동이고 도약이며 움직임이다. 나는 막연한 공상에 잠기는 대신 길을 걸으면서 수천 가지나 되는 물음 목록을 쉬지 않고 뒤적인다.
어쩌면 길을 가는 동안 그 대답을 찾거나 혹은 찾지 못할 수도 있을 물음들. 그 길 끝에 이르면 잃어버린 젊음을 뒤늦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내 몸이 한계에 이르러서 걷는 것을 포기하는 때가 온다면 최소한 그 물음에 맞는 답은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가끔은 망초꽃이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언덕을 조금 벗어나 아름다운 집들과 맞닿은 길도 있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그 집에는 ‘사나운 개 조심’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기도 했다.
때때로 우리는 그 길을 잊고 산다. 자잘한 일상에 묻혀 근시가 되어가다 마침내 저 길을 아주 놓치게 된다면 두려운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너그러운 길은 공기와 같이 값을 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길은 강처럼 이것과 저것 사이에 나 있었고, 나는 가끔 길과 강을 혼동해 도심 거리 한가운데서도 소용돌이치는 물결에 떠내려가는 사람처럼 허우적거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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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란
진주출생
2001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
2003년 마산 창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03년 9월 한국예총 예술세계 수필 신인상.
2004년 5월 수필집 : '유리조각 액자'
현재 경상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
한국문인협회 회원.
진주문인협회 회원.
경남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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