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본다. / 도월화
봄을 본다. 연록색 봄이 나무 가지에 봄봄봄, 하며 피어난다. 돌 틈 사이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솟아오른다. 봄(spring)은 샘(spring)처럼 솟구치고, 용수철(spring)같이 튀어 오르는 것인가.
매서운 꽃샘바람 속에서 매화가 핀다. 매화꽃을 보면 왜 눈물이 돌까. 홍매는 투명한 꽃 분홍 시폰실크 같은 꽃잎 가득, 긴 속눈썹이 애잔하다. 꽃술에 이슬이 맺히면, 미인의 눈동자에 살짝 비친 눈물빛깔처럼 곱다. 순결한 백매는 아치랍도록 너무 여리다. 봄은 슬픔 비슷하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감정을 함께 몰고 다니는가. 아, 봄이구나, 할 때는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가 연이어 눈가에 슬픔이 묻어나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3월의 끝자락, 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한낮인데도 미명처럼 어둡다. 날씨도 침침하고 몸도 노곤하다. 가로수는 아직 헐벗은 채로 서있다. 서울에서 춘천 집으로 가는 길이다. 올 봄에 대학 졸업한 큰애가 연초부터 직장에 나가게 되어 돌봐주느라 이번엔 서울 집에서 여러 날 머물렀다. 지난 금요일에 남편도 합류해서 오늘 휴일을 맞아 우리 차로 가고 있다.
봄 여행 삼아 청평에 들러 가족콘도에서 하루 밤 쉬고 내일 새벽에나 들어가기로 했다. 우연한 기회에 남편이 한시적인 사용권을 갖게 된 곳인데, 전망 좋은 방에 여장을 풀었다. 바깥 쪽 전면이 유리로 된 창 넓은 방에 드니 병풍처럼 둘러싸인 가까운 산이 눈에 들어온다. 산자락에 전원주택 몇 채가 보이고, 나무들은 앙상한 채로 미처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고요하다. 그 아래로 찻길과 나란히 개울이 흐른다. 한 폭의 수묵화 같다.
더 자세히 보려고 오페라 관람용 글라스로 창 밖을 바라보다가 별안간 나는 멈칫하고 놀랐다. 나목이 바로 눈 앞 인 듯 클로즈업되자, 가지마다 촘촘하게 너도 나도 앞 다투어 튀어 오르는 작은 잎눈. 망원 렌즈를 통하여 본 세상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봄의 생명력으로 꿈틀대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수많은 벌레들이 가지에 종횡무진 기어 다니는 듯해서 진저리쳐질 정도이다. 딱딱한 등껍질에서 툭 툭, 옴츠렸던 목을 내어 미는 거북이가 연상되기도 한다.
때가 되면 봄(spring)은 어김없이 온다. 자연의 스프링(spring 용수철)은 고장 나는 법이 없다. 탄력을 잃은 저울(a spring balance)은 제 기능을 다할 수 없고, 태엽 시계 역시 탄성을 잃으면 고장이 나고 만다. 우리 아이들이 생각대로 일이 잘 되어갈 때 저희끼리 잘 쓰는, 시쳇말로 '탄력 받는다'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같은 맥락인가 보다.
지난 달, 큰 아이 대학 졸업식에 다녀왔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아들을 보며 봄을 본다. 넓은 교정은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인생의 새봄을 맞는 졸업생과 축하객으로 붐빈다. 인파에 휩쓸려 몇 번이나 앞서가던 일행을 놓치고 두리번거렸다. 금방 보였던 이들을 끝내 못 찾고 휴대폰을 하면, 사람이 너무 많아 불통이 되어버려 당황하기도 했다.
"아버지, 수고하셨어요."
"네가 공부하느라 고생했지."
법석거리는 중에 어느 다정한 부자의 대화가 귀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흔히 우리나라의 부자간은 좀체로 속마음을 드러내보이지 않았는데, 요즈음은 가족사랑도 무척 격의 없고 유연하다고 할까. 그러고 보니 북새통 속에서도 모두들 웃음을 띠우고 있다. 사노라면 부딪치는 역경에서도 늘 저렇게 봄을 닮은 마음의 탄력이 솟아올라,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인간은 기쁨보다 슬픔을 잘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살다보면 슬픔에 더 익숙해져서 그런 것일까. 노상 힘들게 살아서 마침내 종래에는 기쁜 일이 있어도 '왜 기뻐해야하지?' 하며 쉽게 체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새봄을 맞아 새로 사회에 나오는 젊은이들의 앞날이 항상 싱그럽고 기쁜 미래가 펼쳐졌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두가 저울대처럼 균형 있고, 봄의 약동과 활력이 가득한 인생이 되기를 기원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런데 어디 삶이 그리 녹록하기만 하던가. 늘 쉽지만은 않은 것이 인생이 아닌가.
꽃샘추위, 비바람을 이겨내고 굳건한 뿌리를 내릴 때까지 기다려주고 마음으로 성원해주고 기도해줄 뿐이다. 부모도 그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삶, 스스로 극복하고 다져져야 한다. 그 모든 것이 피해갈 수 없는 통과의례라면 좀 더 때로는 느긋하게, 고비를 넘길 때는 한바탕 바짝 당기는, 활시위처럼 변통성 있게 헤쳐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봄을 본다. 덧없이 짧은 봄이지만, 얼어붙은 마음도 훈훈하게 해줄 것만 같은 봄기운의 탄력을 받아 순간을 영원처럼 늘려가며 살고 싶다. 아니, 영원을 순간처럼 줄여볼 수 있다면 어떨까. 추운 겨울을, 늘어진 듯이 잠자고 있다가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찬물에 세수하는 봄과 같이, 인간도 영 육 간에 제대로 탄성(彈性)을 발휘하며 살아간다면, 순간을 영원처럼 살 수 있는 것일까. 이 비가 그치면 망울진 꽃들이 활짝 피어나 천지간에 고운 빛깔이 더욱 진해질 것이다. (2005. 3.)
[e수필] 2006. 봄 호 수록
 
|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