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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主文없는 종속문從屬文
한상렬
“아!” 쥐가 말했다. “세상이 날마다 좁아지는구나. 처음에는 하도 넓어서 겁이 났는데, 자꾸 달리다 보니 좌우로 멀리 벽이 보여 행복했었다. 그러나 이 긴 벽들이 어찌나 빨리 양쪽에서 좁혀 드는지 나는 어느새 마지막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구석에는 덫이 있어. 내가 그리로 달려가고 있다.”
“너는 달리는 방향만 바꾸면 돼.”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었다.
-카프카, <작은 우화>에서
카프카의 우화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엔 교훈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넓은 세상을 정신없이 내달리다보니 어느새 막다른 골목에 와 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건 인생이란 절망적 통찰뿐. 그 출구 없는 막막함이 때로는 전율을 일으킵니다. 무서운 리얼리즘이지요. 그러나 이는 체험적 사실이 아니니, 어쩌면 리얼리즘이라 할 수도 없겠지요.
답답합니다. 아니 가슴에 무언가가 막혀 출구를 잃은 짐승처럼 때 없이 외롭기도 하고 무의미해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잠시 돌아봅니다. 언제 달려왔는지 까마득합니다. 옛날 같으면 잔치를 하겠다고 법석을 떨 때이지요. 갑년이 되었습니다. 언제 그렇게 가버렸는지 나도 모릅니다. 그냥저냥 살다보니 어느새 서리가 내리고 눈꺼풀이 반쯤은 내려와 앉았습니다.
며칠 전 청주에서 동인들과 박은 사진에는 내 눈만이 반쯤 가려 있었습니다. 슬픈 일이지요. 거울을 보고 있는 내게 아내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삶의 훈장이 아닌가요? 라고. 그건 그렇다 덮어두고라도 이즈막 때 없이 슬퍼집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열심히 달리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따금 내가 무엇 때문에 달리고 있는가 묻습니다. 우울한 일은 그 답이 시원치 않아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깨어 있어야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더라구요.
우리가 눈 속에 선 나무등걸들과도 같으니까. 겉보기에 그것들은 그냥 살짝 늘어서 있어 조금만 밀어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나무들은 땅바닥과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보아라. 땅바닥과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도 다만 겉보기에 그럴 뿐이다.
―카프카, <나무들>에서
주문主文이 없이 종속문으로 시작되는 군요. 그리곤 눈 속에 나무등걸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묘사는 묘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무가 땅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좀 더 넓게 길게 보면 그 역시 사실이 아닙니다. 당장 포클레인이 다가와 깔아뭉갤지도 모릅니다. 아니, 머지않아 빙하기가 올 수도 있겠지요. 눈 속에 있으면 밀쳐질 듯 하건만, 실은 땅에 굳게 뿌리 내린 듯 보입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 보면 가변적이고 불안한 나뭇등걸과도 같이 굳센 듯하면서도 어처구니없이 약한, 약한 듯하면서도 실은 몹시 질겨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봤자 별 것 아닌 ‘우리’ 입니다. 아니지요. ‘나’일지도 모릅니다. 그래 언제나 존재의 미약함에 떨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면,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별로 없는 그래서 허허한 속을 채우노라 미친 듯 매달려왔습니다. 게다가 어쭙잖은 성향으로 타인의 시선을 묻어버리고 제 안의 삶만을 키워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랬습니다. 언제나 나의 삶은 미로와도 같았습니다. 그래 출구를 찾노라 무던히 힘도 들었지요. 눈 속에 선 나뭇등걸과도 같이 불안하고 가변적인 내 삶에 언젠가 타인이 들앉아 있었습니다. 그를 내가 밀쳐내기에는 내 존재의 불안이 지나치게 크게만 보였습니다. “이건 아니지요.”라는 반문을 수없이 뇌이면서도 겉보기엔 그런 나무등걸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카프카의 글은 그저 끈질기고 막막한 기다림입니다. 한 장 남짓한 그의 <법 앞에서>에는 문지기가 지키고 선 겹겹의 문 앞에서 끝내 입장 허가를 받지 못하고 등받이 없는 걸상에 앉아 평생을 기다리다 쪼그라져 죽는 시골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독자들에게는 그것이 한 장의 판화처럼 각인되기도 합니다. 그래 그의 작품에는 고향과 낯선 곳이라는 근본적, 실존적 갈등과 그 사이에서 삶의 연관을 이루어 보려는 헛된 노력이 거듭 나타나곤 합니다. 하기에 그의 작품에는 사물들의 낯섦, 낯선 사물에 대한 작가의 서늘한 시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체념이 속속들이 서려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삶과 글쓰기는 숙명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낮에는 관립 보험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썼다고 합니다. 삶의 조건 속에 내던져진 막막한 인간 존재. 위로나 해결은 없습니다. 존재의 조건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우리의 인식과 그런 삶을 택하는 자유가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올곧게 살고자 노력했던 어제가 있었다면 그로써 족할 일이겠지요. 먼 곳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신새벽을 달려오는 닭울음소리가 아침을 깨웁니다. 세상은 개벽을 준비합니다. 이제 새롭게 시작해야하렵니다. 그러기 위해선 깨어 있어야 하겠지요.
(『창작수필』, 200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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