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처럼 꽃처럼 / 도월화
나의 글은 내 고달픈 인생 여정의 뒤란에 핀 작은 풀꽃이기를 바란다. 잡풀 사이 어딘가에 피어난 들꽃은 노래한다. 나는 노래를 불러야 하리. 지금 이 순간이 꽃피는 봄이라네. 나의 곡조가 진실할 때 겨울에도 금빛 수선화가 피어난다네. 나의 가사가 치열할수록 모든 침묵하는 존재의 기쁜 찬가 소리 들려오기 시작하네.
뒤뜰에 숨어 몰래 핀 작은 풀꽃에도 달이 스며든다. 프랑스의 작곡가 드뷔시의 피아노곡, 「달빛(Claire de lune)」을 들으면 달빛은 느릿느릿 기어간다. 제 그림자를 밟으며 고요한 걸음으로 달이 가고 있다. 달빛은 있는 듯 없는 듯 여리고 부드럽게 천천히 움직인다.
달은 내가 어디에 가든지 언제나 그 자리이다. 하지만 은연중에 차오르고 이지러짐을 반복하고 있다. 변화를 좋아하지 않고 한결같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달처럼 꽃처럼 살지는 못해도, 밤에는 달 낮에는 풀꽃을 보며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로 가득 찬 나날을 맞았으면 한다. 과수원을 하신 할아버지께서 '여월여화(如月如花)'에서 따온 내 이름을 지어주실 때는 달빛내린 사과꽃밭을 연상하셨을지 모르나, 그저 눈에 띄지 않는 들꽃을 닮아갈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있겠는가.
희망찬 아침, 은혜로운 저녁이면 좋겠다. 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 나무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고, 잎 새의 이슬이 반짝거릴 때 풀은 자기표현을 한다면, 우리는 언제 자아실현을 일궈간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은 주어진 하루하루에 감사할 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산들바람 불어오는 장미 화원에서 흑장미 백장미 분홍 노랑 장미향이 날 때, 마침 정원 앞길에 성장한 여인이 지나가 바람결에 화장수 향내가 스칠 때, 작은 꽃무늬 놓인 하얀 원피스에 빨강색 허리띠를 띤 말총머리 소녀가 그 여인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새록새록 생생한 존재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는 누구에게나 사는 건 고달프고 고해 같지 않을까. 어느 시*의 한 구절에 나오듯이 '누구에게나 비오는 날이 있는 법.'이다. 다만 슬픈 날은 오늘만 슬퍼하고 내일은 절망하지 않을래, 라고 다소 비스듬하게 비껴서 객관성을 유지하며 지혜롭게 살려고 노력하다보면, 또 이렇게 멋진 날이 내게도 오는구나, 싶을 때가 있게 마련 아닌가. 비록 그담엔 금방 또 가슴에 비 내리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햇빛 좋은 날과 궂은 날을 자꾸 반복하다가 언제부터인가 생명의 축복만큼 큰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게 아닌가. 살아있다는 것. 한정 없이 무상인 공기, 햇빛, 자연을 누리고, 인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 누군가 말했듯이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것,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귀히 여겨지고 고마울 때는 글로 흔적을 남겨두고 싶어진다.
피천득 님의 「수필」에는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라는 글귀가 나온다.
한 조각 연꽃잎이 꼬부라지듯이 지구도 약간 기울어져 있다. 내 삶의 뒤란에 핀 풀꽃도 지축의 기울기로 달빛을 받았으면 좋겠다. 지구가 23.5도 기울어 돌기 때문에 햇빛이 비추는 각도가 바뀐다고 한다. 기울기로 인해 사철이 생겨난다. 내 겉면에 수직으로 고정된 시선에서 벗어나, 깊은 내면과 문화 전반에 관련된 소재에 엇비스듬히, 다양한 시각과 관심을 지니고, 사계절처럼 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면.
사계는 늘 새롭다. 매순간 달라지는 우주 만물의 자생력에 힘입어 나의 수필은 삶의 생채기를 다독여 새살이 돋게 해 주면 좋겠다. 매일 매일 평온하고 긍정적인 새 세포를 생성하는 내 영혼의 치유제이면 한다. 원컨대 나의 문학은 나날이 새로운 자연을 본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달처럼 꽃처럼......
(창작수필2008.봄호 수록)
註
* 시,「비오는 날」/ 롱펠로 (Longfellow, Henry Wadsworth 1807~1882 미국). <밤의 소리>, <민요 시집>, <에반젤린>, <인생의 찬가> 등의 작품을 썼다.
☞ 달과 꽃이 있는 서정 수필의 향기/ 정목일 수필가 / 달처럼 꽃처럼 서평 click ☜
도월화 ( 수필가 )
수필집『여월여화 (如月如花)』(2007),『달처럼 꽃처럼』(2014) 출간.
제33회 한국수필문학상 수상(2014)
너섬 시니어아카데미 수필강사(2014 ~ )
선수필 편집위원(2012 ~ )
수필넷 에세이 아카데미아 sysop(2004 ~ )
한국문협회원 창수회원 사계회원 한국수필가협회회원
2000년 <창작 수필>에 [잃어버린 향기] 당선으로 등단
(前)영등포 중 사회과 교사
(前)한국 가정법률상담소 전화상담 (10년간:주1회봉사)
경북 군위 출생
개인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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