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 / 홍미숙
담쟁이가 덩굴손을 앙증맞게 한 뼘 한 뼘 뻗어가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담쟁이는 여름에 가장 많은 그림을 그린다. 담쟁이만한 화가도 드물다. 한 화폭에 수십 년 이상을 그리기도 한다. 끈기가 대단한 화가다. 그림을 화폭에 가득 그리고 나면, 그 위에 덧칠 기법을 살려 그럴듯하게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담쟁이가 좋아하는 화폭은 담이 으뜸이다. 그러나 요즘은 벽도 좋아한다.
평생 동안 묵묵히 그림만 그려나가는 담쟁이다. 다른 일에 도무지 관심이 없다. 일편단심 그림 그리는 것에만 열중이다. 봄부터 가을이 오기 전까지는 초록 물감만 풀어 칠을 해 나간다. 그러다가 가을이 오면 형형색색의 물감을 풀어 놓는다. 가을이 담쟁이가 그림 솜씨를 최고로 발휘할 수 있는 계절이다. 겨울이 다가와 잎이 다 떨어져나가면 줄기와 가지만으로 그린 밑그림을 볼 수 있다. 밑그림까지 보여주는 용기 있는 화가다. 해가 갈수록 밑그림이 탄탄하게 뿌리를 내린다. 그 밑그림을 토대로 해마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림을 그려나간다.
담쟁이는 담이 없으면 벽을 타고 오르고, 벽이 없으면 어느 나무든 타고 오른다. 그저 무엇이 되었거나 타고 오르는 게 담쟁이의 습성이다. 타고 오르는 솜씨가 원숭이와 다람쥐 댈 게 아니다. 오르다 미끄러지거나 떨어지는 경우는 없다. 누가 일부러 떼어놓기 전에는 찰싹 붙어있다. 아기가 엄마 등에 매달려 떨어질 까봐 꼭 붙들고 있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어떠한 비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담쟁이가 그려놓은 그림 솜씨를 보면 자연의 위대함에 주눅이 든다.
내가 자주 만나는 담쟁이가 있다. 자동차 소음을 막기 위하여 설치해 놓은 방음벽에 벽화를 몇 년째 그리고 있는 담쟁이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방음벽을 흔히 볼 수 있다. 철판으로 만들어져 높이도 꽤 높다. 큰 도로 주변에는 방음벽을 설치하지 않으면 시끄럽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나보다. 내가 만나는 담쟁이 역시 그림 솜씨가 대단하다. 방음벽을 화폭삼아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 솜씨를 뽐내고 있다. 벽화가 완성되려면 아직 몇 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담쟁이가 대작에 도전하고 있다.
담쟁이는 독창성이 뛰어난 화가다. 그림 기법이 다양하다. 어느 담쟁이 화가는 막대그래프를 그리듯 오직 하늘만 향해 올라가는 모습을 그린다. 또 다른 담쟁이 화가는 꺾은선그래프를 그리며 담쟁이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표현한다. 그리고 혼자 일어설 수 없는 담쟁이를 위해 담이나 벽을 의지하긴 했지만 당당하게 서있는 모습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늘씬한 미루나무 모습으로도 그리고, 넉넉한 느티나무 모습으로도 그려놓는다.
나는 담쟁이가 그리고 있는 다양한 그림들을 보면, 천태만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상만 향하는 담쟁이를 보면 욕심 많은 사람의 모습이 느껴진다. 혼자만 잘 살고 혼자만 출세하려는 이기적인 사람을 닮은 것 같아 보인다. 반면 어께동무 하듯 얽히고 얽혀가면서 올라가는 담쟁이의 모습에서는 따뜻한 인간애를 느낀다. 담쟁이도 사람들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이 역시 아름답다. 옆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한 몸만 생각하며 정상을 향하는 모습은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담쟁이만큼 자연미를 연출하는 식물은 없다. 자연미는 담쟁이가 그려놓은 벽화에서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다. 자연을 잘 표현하는 화가로 담쟁이가 으뜸이다.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담쟁이만큼 자연미 넘치는 벽화를 그려내기 힘들 것이다.
여름이 무르익자 정상에 도달한 담쟁이가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한다. 정상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 마치 인간 승리자를 보는 듯 하다. 그런데 그 모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며칠 후에 보니 만세를 부를 때의 모습은 오간데 없고, 정상에서 지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축 늘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동안 욕심쟁이 같아 미워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목표를 향하여 밤낮으로 고생고생하면서 꿈을 이룬 사람을 닮은 담쟁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저만 잘 살아보겠다고 이웃은 거들떠도 안 보고 살아가는 사람으로만 봤으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 후로 몇 번 만나다보니 차츰 성공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 담쟁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정상에 오른 담쟁이의 모습이 너무 애를 써서 진이 다 빠져버린 사람의 모습처럼 보였다.
담쟁이는 사람을 닮은 데가 많다. 정상에 올라가려는 것이 닮았고, 올라가서는 좀처럼 그 자리를 내려오지 않으려는 것도 닮았다. 그러나 올라가면 내려와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인 것을 어쩌겠는가. 정상에서 자리다툼을 하다가 지친 담쟁이를 보면서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명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 먼저 정상을 정복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가 보다. 다른 담쟁이에게도 정상 정복의 쾌감을 느끼게 해주는 아량이 필요하건만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나 보다.
일찌감치 정상을 정복한 담쟁이가 있는가 하면, 아직 중간까지 밖에 올라가지 못한 담쟁이가 있다. 정상까지는 한참이나 남았다. 어찌 보면 정상에 도달한 담쟁이가 그들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정상을 정복하여 성취감을 느낀 것도 잠시,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렇지 않겠는가.
며칠 뒤에 방음벽을 그리고 있는 담쟁이를 다시 만났다. 정상에 올라간 담쟁이는 끝내 내려오는 것을 포기한 모양이다. 여전히 정상에서 헤매고 있다. 여러 날 동안 그렇게 담쟁이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덩굴손을 어디로 뻗어야할지 아직도 몰라 아까운 세월 다 보내고 있다. 담쟁이 화가는 정상에 대고 덧칠을 수없이 하여 서로 물감들이 엉켜버렸다. 여전히 정상에서는 담쟁이들의 자리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 중 멋진 한 담쟁이가 나타났다. 중간밖에 올라오지 못한 친구들의 손을 잡아주려는지 올라왔던 길을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은 없었다. 내려가는 담쟁이의 모습이 그동안 그린 그림 중에 최고의 명화(名畵)였다.
정상에 올라간 대부분의 담쟁이가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축 늘어졌던 담쟁이까지 한데 엉켜 떡이 되어버렸으니 뜯어말릴 수도 없다. 난리도 아니다. 끝까지 양보를 못하겠다며 정상에서 물러날 줄 모르고 있다. 내가 정상까지 오를리도 없지만 그런 담쟁이를 닮을까봐 두려워진다.
사람도 담쟁이와 다르지 않다. 무엇이나 욕심을 정도껏 부려야하는데 지나치면 문제가 발생한다. 높은 위치에 올라갔으면 적당한 선에서 내려갈 줄 알아야 하건만, 그것이 안 되는 사람이 많아 세상이 어지럽다. 계속 욕심을 부리다가는 누구든 낙동강에 오리 알 신세가 분명히 되고 만다.
나는 담과 벽을 화폭삼아 그림을 그리는 담쟁이를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무엇보다 담쟁이의 모습에서 정상을 오르는 것만이 최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다 올라갔을 때보다 올라갈 게 남아있을 때가 행복한 것이고, 채울 게 많이 남아있을 때가 더없이 행복한 것임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정상에 올랐으면 정상 자리를 적당할 때 내 놓을 줄 알아야 함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담쟁이가 담이나 벽을 화폭삼아 그림을 그리듯, 나도 내 인생의 화폭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나가고 싶다. 나는 막대그래프보다 꺾은선그래프를 그리면서 살아가고 싶다. 꺾은선그래프가 자연미도 있고, 무엇보다 인간미가 있어 보여 좋다. 정상을 향해 무조건 올라가기만 하는 삶보다 설령 정상은 못 가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꺾을 줄도 아는 삶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나도 수십 년간 그려온 내 인생의 밑그림을 토대로 화폭을 아름답게 채워나가야겠다. 누가 보아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게 소망이다. 꽉 찬 삶보다 조금은 엉성해 보이는 삶이 더 좋다. 나는 어느 정도 여백을 두고 내 인생의 그림을 그려 나갈 것이다. 담쟁이가 그려놓은 벽화도 여백이 없으면 별로다. 밑그림만도 못하다. 완벽한 사람을 대할 때처럼 어딘지 모르게 갑갑하다.
살면서 서둘러 정상에 오를 필요는 없다. 서두른 만큼 빨리 지치기 때문이다. 뭐든 남겨놓는 게 좋다. 인생도 미완성이라 아름다운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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