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 한 줌
-가을 기도
鄭 木 日
가을이면 풀밭, 바위, 혹은 산등성이에 앉아 기도를 드리고 싶어집니다. 가만히 누가 그런 기도의 시간을 허락해 주시는 걸까요. 나도 모르게 스르르 마음의 문이 열려 하늘을 올려다보며 꿇어앉고 싶어집니다. 하늘의 문이 활짝 열리고, 자애로운 햇살과 상쾌한 바람이 내려와 온 몸을 휘감아 버립니다. 은총의 시간입니다. 깊이도 모를 영원으로 열려 있는 하늘을 우러러 보는 순간을 주십니다. 땅에 꿇어 앉아 두 손을 모읍니다.
들판은 이제 황금빛깔로 채워졌습니다. 지나간 여름은 장마가 길어서 햇살을 흡족하게 받지 못하였습니다. 곡식에서부터 풀씨에 이르기까지 모든 초목들에게 일 년의 결실이 튼실하게 여물도록 하십시오. 햇빛이 모자란 오곡백과들이 빛살을 모아 맛과 빛깔과 모양과 향기를 제대로 내게 하십시오. 과실의 과액을 감미롭게 하시고 쑥부쟁이, 구절초 꽃의 빛깔과 향기가 넘치도록 하십시오.
농부들이 땀 흘려 가꾼 농사는 어찌 그들만의 일이겠습니까. 생명의 씨앗을 심고 거두는 일은 하늘의 보살핌 없이는 이룰 수 없습니다. 가을 햇살만큼 은혜로운 게 없다는 걸 들판에 오면 느낄 수 있습니다. 햇살을 흠뻑 받고 황홀한 마음으로 마지막 결실을 이루려는 초목들의 숨결이 바로 곁에서 들려옵니다.
추석이 지났건만 아직 농부들은 추수를 하지 못합니다. 햇살을 많이 받지 못한 초목들은 한 줌이라도 더 받아 온전한 결실을 이루려고 안간 힘을 쏟고 있습니다. 햇살의 은총은 솜사탕처럼 감미롭습니다. 푸른 하늘과 눈부신 햇살이 벌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입니다. 생명을 잉태시킬 씨앗을 여물게 합니다. 가을 햇살은 하늘의 축복, 사랑, 은혜입니다.
넉넉한 햇살을 주셔서 단풍이 잘 들게 하십시오. 벌거숭이가 되기 전에 마지막 단장을 허락하시고 별리의 시간을 주십시오. 떠나갈 순간이 다가오기 전에 고별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별리는 가슴을 아프게 하지만 성숙과 깊이를 줍니다. 아름다움이란 사라지는 것, 간직할 수 없는 것, 영원의 결핍이 피어낸 꽃입니다. 단풍, 꽃, 무지개, 저녁노을이 그러합니다.
풀벌레소리가 잘 들리도록 하십시오.
가을밤에 풀벌레들은 고별 연주회를 엽니다. 짧은 일생에 터득한 깨달음의 말들이 절창이 되어 흐릅니다. 세상에 오직 한 수신자를 찾기 위한 고독하고 간절한 연주-. 어둠 속에서 심신으로 부르는 발신음(發信音)이 떨려나가고 있습니다. 주고받는 소리들은 허공중에 무엇이 되어 만날까요. 가을밤에는 누구라도 외로움에 떨지 않고 그리움의 오솔길을 찾아가게 하십시오.
기러기가 구만리 창공을 날아서 잘 가게 하십시오.
떠날 철새에겐 하늘 길을 열어주셔서 길을 잃지 않고 잘 가도록 하십시오. 청동오리, 가창오리, 고니 등 겨울 철새들이 돌아오도록 하십시오. 머나 먼 길을 떠난 철새들은 한 번 공중에 오르면 날개를 쉬지 않고 며칠 몇 밤을 날아가야 합니다. 의지할 할 곳이라곤 하늘뿐입니다.
가을은 떠날 곳이 훤히 보이고, 존재의 무게와 깊이를 드러냅니다.
나는 지금 삶의 어느 시. 공간에서 무엇이 되어 있는 것일까. 과연 한 톨의 씨앗을 온전하게 여물게 하고 있는가. 햇살 한 줌이라도 헛되이 놓치지 않으려 정성과 집중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세월을 놓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가을이 돼서야 자신의 빈약한 삶의 무게와 깊이, 초라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선명하지 못한 빛깔, 향기 없는 인생을 절감합니다. 잘 여문 알맹이는 없고 쭉정이만 안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을 벌판은 풍요하나, 제 마음은 고독하고 허전합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모양과 빛깔과 향기를 얻지 못한 후회가 치밀어 오릅니다.
가을은 만물에게 존재를 드러내게 하십니다. 땅에 꿇어 앉아 기도를 바칩니다. 남은 시간에 하나라도 온전한 결실에 이를 수 있도록 넉넉한 햇살의 자비와 은총을 베푸십시오. 하늘을 열어서 햇살과 바람으로 쓰다듬어주십시오. 햇살에 반짝이는 풀씨이게 하소서. 쑥부쟁이 꽃이거나 구절초 꽃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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