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蘭) 사랑 / 황민자
내가 난과 인연을 맺은 지는 얼추 10년이 넘는다. 결혼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그해 이른 봄에 전라도 부안 땅의 어느 야산에 갈 일이 있었다. 산 중턱 소나무 아래 노란빛을 띤 꽃들을 자세히 보니 야생춘란(春蘭)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에 대하여 문외한이여사 손에 닿는 대로 몇 포기 뽑아왔다. 그 뒤, 나의 이기심으로 자연과 더불어 자라던 것들을 답답한 내 집으로 들여온 미안함 때문 이였을까? 난을 보살피다 자신이 없을 때면 녀석들이 자라던 야산을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네들이 고향은 이러했다. 바다 해풍이 비스듬히 비켜 가는 동쪽 야산에, 위로는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아침이슬과 막 떠오르는 동쪽 햇빛, 그리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습한 해풍과 친구 되어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떨어진 솔잎에 의지하여 추위를 견뎌내고 이듬해 봄에 꽃을 피워냈을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생각하며, 소나무 대신 갈대발을 쳐서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기도 하고, 더운 날이면 해풍 대신 바람을 쏘여주고, 아침이슬을 대신하여 물을 뿌려주기도 한다. 겨울이면 솔잎 이불대신 거실문을 열어 베란다의 냉기를 막아준다. 그러나 그네들을 거실로 들이지 못함은 추운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이듬해 꽃을 피우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남편은 베란다 가득 차지하고 있는 난 화분을 못 마땅해 한다. 화분을 모두 치우고 그 자리에 운동기구를 들여놓고 싶은 게 남편의 바램이다. 일년 내내 별로 달라진 모습도 없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다 비슷비슷해 보이나 보다. 관상수나 낙엽송처럼 계절따라 새싹도 나고 낙엽이 지는 변화가 없으니 수십 개의 분이 같은 모양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다른 식물처럼 봄이면 연초록 신아(新芽)를 준비하여 고개를 내밀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꽃을 피워내기도 하고, 수명이 다한 잎새는 낙엽이 되기도 한다.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며 다음 계절을 준비할 줄도 안다.
나는 난 분을 죽이는 일은 거의 없지만 기억에 남는 두 개의 분이 있다. 하나는 막내 동생이 제주도 신혼여행 후 선물해 준 제주한란이었다. 귀한 난이다. 그래서 특별히 고풍스러운 분에 옮겨 심고 정성을 쏟았는데 웬걸 시름시름 죽고 말았다. 난은 자리를 이동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도 전에 분을 옮기고 물을 너무 자주 주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다른 하나는 자생춘란의 변이종으로 시동생이 온 산을 돌아다니며 산채 (山採)한 것을 나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잎의 둘레에만 흰 테두리가 있는 꽤나 값나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값에 너무 신경을 썼는지 그것 역시 한 해를 겨우 넘기고 죽고 말았다. 옛 성현이 이르기를 '얻기 어려운 재물일수록 귀하게 여기지 말라' 했거늘 과잉보호의 결과를 난을 통하여 배운 것이다.
베란다를 가득 채우고 있는 난 분 중에서 각별히 아끼는 것이 있다. 기왓장 위에 심어진 석곡(石斛)이 그것이다. 석곡이란 바위에 붙어사는 난 중의 하나 인데 전라남도 지방에서 주로 발견되는 자생란이다. 아는 분이 직접 산채 하여 선물해 준 것이라 귀하게 여기는 탓도 있지만, 그 받침이 되고 있는 기와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우리집은 기와 공장을 하였다. 황토색 흙으로 기와를 빚어 커다란 가마에 장작불을 지펴서 구워내면 까맣고 윤기가 흐르는 흙기와가 되었다. 그 뒤 새마을 운동의 여파로 빨갛고 파란 시멘트기와에 밀려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3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어도 친정집은 그때 구워낸 검은 기와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당신이 구워내신 흙기와에 더 애착이 간다. 그래서 아직도 집안 모퉁이에 쌓여있던 기와 중에서 지붕의 마감재료로 맨 마지막에 얹혔던 와당을 몇 개 가져왔다. 그래서 그 안을 이끼로 채우고 석곡을 심었더니 몇 년이 지나자 이제 제 집인 냥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기와 속에서 자라는 석곡을 보노라면 친정아버지가 생각난다.
때때로 우리 집을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많은 난 중 하나쯤은 들어내도 되지 않을까 하며 은근히 욕심을 낸다. 그러면 난감해진다. 어느 것 하나 들어낼 것이 없는 이유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다. 처음 난을 기를 때는 다른 사람에게 곧잘 주었다. 그러나 그 뒤 안부를 물으면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거의 죽어서 버렸다고 하였다. 그럴 때면 차라리 그때 섭섭하고 말 것을 공연히 주었나보다 후회를 하게 된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집에 시집보내기가 더 어렵다. 어느 시장어귀 좌판에서 샀던 소엽풍란, 세계 란 전시회를 관람하며 구입 해온 소심, 처음 집 장만을 하여 집들이 선물로 들어온 보세란, 남편의 승진을 축하해 준 사계란…. 분 하나 하나에 우리가족의 살아 온 모습과 역사가 있다. 어찌 다른 사람들이 그 깊은 뜻을 알까.
갈한 난 분에 물을 준다. 낮 동안의 더위에 지친 잎들이 생기를 되찾는다. 촉 사이에 고인 물을 없애느라 바람을 주었더니 살랑살랑 부딪히는 잎새들이 시원하다고 노래하는 듯하다. 10여년 동안 단 하나의 신아 만을 키워내고 있는 풍란에 눈길이 머문다. 강산이 바뀌었을 세월을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는 무던함에 연민을 느낀다. 쑥쑥 자라지 않아도 서두르지 않고, 살림이 늘어나지 않아도 욕심부리지 않는 삶의 여유를 오늘도 배운다.
* sysop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9-28 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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