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취인 없는 편지
吳 岐 煥
오후가 되면 우편함에서 우편물을 꺼내온다. 너 댓 통이 들어있다. 카드이용대금 청구서, 세금고지서, 상품광고물, 모임을 알리는 내용들이다. 요즈음은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변화 속에서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며 사는 현대인들이 전화나 전자우편과 같은 첨단 통신수단으로 편지를 대신하고 있다. 이제 편지는 연하장이나 청첩장 같은 인사치례가 아니면 연인의 애틋한 감정을 전하는 비장의 무기로나 쓰이고 있을 뿐이다. 해서 연필이나 볼펜으로 꼭 꼭 눌러쓴 편지가 그리워진다.
나는 비밀상자를 두세 개 가지고 있다. 2,3십년의 세월이 담겨 있는 비밀상자. 그 속에는 편지 일기장 같은 내 속내들이 들어 있다.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가셨거나 이 세상에서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보내준 편지이기에 더욱 시린 가슴으로 가끔 비밀상자를 열어보고 그리워하며 산다.
어머니는 열흘이 멀다하고 편지를 보내셨다. 한번도 렌즈를 교환한 적이 없는 한쪽 다리가 굵은 실로된 검정 뿔테 안경을 쓰고 편지를 쓰셨다. 언문체로 또박 또박 내려쓴 사연은 양면괘지 양면으로 두서너 장이 되었다. 날씨가 추우니 감기 조심해라. 끼니 거르지 말고 챙겨 먹어라. 밥이 보약이니라. 이 어미는 잘 있으니 아무 걱정 마라. 답장 자주 하지 않는 무심한 네가 섭섭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주경야독하는 너를 생각하면 그런 생각은 잠시일 뿐 안타깝고 애처로운 생각뿐이다. 모쪼록 언행에 조심하고 뼈대 있는 집안의 자식답게 행동거지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 저 세상에서 네 아버지가 내려다보고 계신다. 내말 명심 하거라. 이런 사연들이 대전에서 인천과 서울로 열흘이 멀다하고 배달되었다. 내가 가정을 이루고 어머니를 모실 때까지 오륙년이나 계속 되었다. 백여 통의 어머니 편지 사연들은 내 행동의 지표가 되었고 삼십 여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비밀상자 속에는 내 마음을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준 사람의 편지도 들어 있다. 고등학교 창작교실에서 만난 그네. 그네를 향하여 밤이 이슥하도록 편지를 썼다. 문학을 말하고 암울한 시대에 절망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반항하고 그리고 그네가 보고 싶고 그립다는 글을 쓰고 또 썼다. 창작교실에서 만나면 남몰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네의 편지는 감동이 되어 내 마음을 천둥소리 보다 더 크게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런 집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일 수 없다’는 어머니의 편지는 우리를 나누어 놓고 말았다. 내 행동의 지표였던 어머니 편지는 이별의 천둥소리였다.
서점에서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라는 책을 샀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관료였던 퇴계 이황(1501-1570)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이 13년 동안 주고받은 백여 통의 편지를 번역한 책이다. 쉰여덟의 퇴계와 서른둘의 고봉은 공무 차 오가는 지인이나 심부름하는 종들을 통해서 편지를 전한다. 당시 한양에서 전라도 광주를 사이에 두고 일상의 안부나 소식을 전하는가 하면 학문적 논쟁을 하였으며 유명한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을 시작하였고, 나이와 선후배의 벽을 뛰어 넘어 서로 존경하고 건강을 걱정하고 가정사를 의론하고 사무친 그리움을 토해내기도 한다. 편지가 서로 어긋나 전달되지 못하는가 하면 일년여 후에 너 댓 통의 편지를 한꺼번에 받으면서 탄식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그 당시 편지는 자신의 생각을 다듬어 놓는 방법으로서 선비들의 문집에서 시와 함께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편지는 일상의 안부나 소식을 전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학술논문 이기도 했으며 자기성찰이기도 했다. 나는 그 편지를 통해서 그들의 생활은 물론 사상의 전개, 가치관등을 들여다본다. 얼마전 성북동에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말년을 보냈던 심우장 툇마루에 앉아 그의 꼿꼿한 삶을 되새겼던 그런 심정으로 퇴계와 고봉의 편지를 읽는다.
나는 우리 집 장손 태석이와 이메일로 대화하듯 소식을 주고받는다. 초등학교 이학년인 고놈은 편지를 써서 우체국에 들고 가지는 못해도 이메일로 편지 쓰기는 나보다 한수 위다.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태석이와 나처럼 편지 대신 이메일로 사연을 주고받는가 하면 연인들도 핸드폰 문자메세지로 애틋한 감정을 주고받는다. 해서 우편집배원의 가방에는 고지서나 광고물로 가득할 뿐이다.
하지만 유치환 시인은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쓰고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 ‘우편국’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나도 가끔은 주민등록지가 없는 세상으로 이사를 한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고 친구에게도 스승에게도 편지를 쓴다. 뒷골목에 있는 빨간 우체통에 넣어도 되돌아오는 수취인이 없는 편지를.
오늘도 내 자신에게 쓰는 편지는 한 편의 수필이 되어 쌓여만 간다. 한 뼘도 안 되는 해를 남겨 놓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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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환
'창작수필'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문학가협회
한국수핀문학진흥회 창작수필문인회 회원
저서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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