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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珍 박 기 옥
지금도 문득 생각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의 머릿속은 아직도 안개 속의 미로를 헤매고 있다. 불과 일주일 전에 일어난 일이다.
대학원 세미나 시간에 토론 주제가 낭만주의였던 것은 정해진 교과과정이었다. 19세기 문예사조에 관심이 있던 나는 ‘낭만주의에 관한 오해’라는 제목으로 발제자가 되어 토론을 이끌고 있었다. ‘오해’라는 부분이 흥미를 끌었던지 참여도는 높았다.
먼저 서구에서 18-19세기에 꽃을 피운 낭만주의가 한국에서는 100년 후인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상륙하게 된 배경과 한국에서의 낭만주의가 갖는 상징성이 간단히 설명되었다. 한(恨), 애수, 폐허, 절망, 그리움 등으로 요약되면서 파워포인트에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 뿌려졌다.
낭만주의의 대표작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로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감동을 준다. 그 자신 약혼자가 있는 여인을 사랑하여 지독한 절망에 빠져들었던 괴테는 주인공인 베르테르를 통해 절대적인 사랑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치명적인 독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 주며 끝내는 죽음을 선택하게 한다.
작품을 읽은 많은 젊은이들이 베르테르에 매료되어 옷차림에서부터 말투, 몸가짐, 사랑에 상처입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까지 흉내 내는 현상이 일어나서 ‘베르테르 효과' 라는 말이 생겼다던가.
토론이 한창 익어 갈 무렵 노크도 없이 교실 문이 벌컥 열렸다. 행정실 직원이었다. 사색이 된 얼굴로 전하는 이야기, S의 자살 소식이었다. 30대 초반의, 방글방글 잘 웃던 단발머리 여학생이었다. 바로 어제 나하고 저녁을 같이 먹었었다.
“낭만에 대한 오해가 정말 오해일까요.”그녀가 말했다.
“원래는 꿈, 자연, 인간이 주제거든요. 20세기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허무, 절망, 애수로 변질되고 말았죠.” 나의 대답.
“어느 것이 본질인지는 알 수 없는 거잖아요.”
나는 그때 마음속으로 내일 세미나 시간의 질의자로 그녀를 찍었었다.
그런데 자살이라니!
교실 한 쪽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지도교수가 울음을 터뜨린다. 집안 일로 주말에 친정에 가 있었는데 S가 전화를 했더라고 한다. 상담을 좀 하고 싶다기에 논문 관련 의논인가 싶어 세미나 끝난 후 시간을 내겠다고 무심히 대답했는데 일이 이렇게 심각한 상황인 줄 몰랐다며 가슴을 친다.
그러니까 S는 지도교수, 선배,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보이고 비명을 질렀건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던 셈이다. 죽은 후 검색 해 본 그녀의 컴퓨터에서는 스무 개 이상의 자살사이트가 접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모두 잠든 깊은 밤, 절망의 벼랑 끝에서 그녀가 선택한 삶의 포기는 무슨 의미였을까. 죽음의 미학이었을까. 극도의 염세였을까. 진실이 무엇이든 나의 입장에서는 마지막으로 나눈 그녀와의 대화를 떨칠 수가 없었다. 어느 것이 본질인지는 알 수 없는 게 아니냐고, 그녀는 말했었다.
토요일 오후. 그녀가 없는 한적한 캠퍼스의 벤치에 앉아 상념에 잠긴다. 장례식 때의 정경이 스크린처럼 눈앞을 지나간다.
가족들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얼굴을 들지 못했고, 학우들인 우리 또한 각자의 입장에서 무관심을 자책했다. 그 누구도 사인(死因)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죽음을 선택한 사람을 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장례식 내내 머릿속을 어지럽힌 건 오히려 날씨였다. 한 생명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하늘은 맑고 비행기는 뜨며, 꽃들은 다투어 피어나고 있었다.
전 날 내린 소나기로 관이 나가는 시간에는 하늘 끝자락에 무지개가 뜬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저승으로 건너가는 다리였을까.
구약성서에 의하면 신이 더 이상은 홍수로 생명체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노아에게 약속한 표식이 무지개라고 했던가. 무지개가 희망의 상징이 된 배경일터이다.
이 순간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생명이 아닐끼. 그 속에 생성과 소멸이 있어 이렇게 시끌벅적 살아가고 있는 것을.
낭만은 소멸의 부추김이 아니라 생성의 강화이다. 평범한 것에는 신비를 보여주고, 익숙한 것에는 미지의 꿈을 부여한다. 유한한 것에는 무한의 가상을 제시하고, 화석화된 생명에게는 부활을 촉구한다.
어쩌면 낭만이 생명을 수호하는 마지막 비결이 될 런지도 모를 일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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