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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채영(2009-08-13 13:32:43, Hit : 1213, Vote : 103
 칸나의 담장

  
칸나의 담장 -김채영-

길을 가다가 담 너머로 눈을 맞추려 애쓰는 칸나를 본다. 울안에 여러 꽃들과 함께 심겨졌으련만, 칸나는 뿌리만 울안에 살짝 담그고 무료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활짝 피어 담 밖을 곁눈질을 하고 있다. 터무니없이 새빨간 꽃잎을 보라. 영락없이 농염하기 짝이 없는 여인네의 입술이다. 칸나는 덩굴장미처럼 무모하게 담을 넘지는 않는다. 담장 밖을 은밀하게 넘보다 몰래한 사랑에 저리 꽃잎이 애처롭게 고운가 보다. 한동안 수없이 반란을 일으키던 사랑니도 저러했을까. 한철 불꽃처럼 피어 담장 밖을 수없이 넘겨보다 포근한 흙 속에서 동면하는 칸나의 알뿌리처럼 내 잇몸에는 사랑니의 뿌리가 있다.
  지혜를 알만한 나이에 발육된다는 사랑니. 그러나 치아 중에 가장 늦게 나서 맨 먼저 뽑히는 게 사랑니이다. 이가 올라올 적에 사랑의 열병처럼 아프다 하여 사랑니라고 불리었는지도 모른다.

사랑니가 나기 전 모든 치아들은 이미 자리를 잡혀있다. 비좁은 틈새로 눈치를 보며 뿌리를 내리기에 그것은 애초부터 화초 속에 잡초처럼 천덕꾸러기였는지 모른다. 설자리를 확보하지 못해 사랑니는 수없이 모반을 일으키다가 결국 짧은 생을 마감한다. 인류가 진화를 거듭하는 동안 거친 풀뿌리 같은 것을 주식으로 삼던 사람들이 불의 발견이후 익힌 음식을 먹게 되자 턱은 더 이상 발달할 이유가 없었다. 사람들의 턱은 좁아지고 본시 44개였던 치아가 32개로 줄었지만 아직도 여분으로 남은 사랑니의 퇴화 과정이 도래 되고 있는 것이다.

사춘기 때 어렵게 갖게 된 사랑니가 서른이 넘어서야 병이 났다. 치통을 산고의 고통에 비할 수 있겠냐만 여러 날 밤낮을 천장의 꽃무늬가 해체되어 우수수 떨어지는 듯 정신이 혼미했다. 이를 뽑으러 치과에 갔는데 마취가 쉽게 되지 않는 체질이라 여러 번의 주사가 소용이 없었다. 이앓이의 고통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의사의 만류에도 결국 생니를 빼는 위험한 선택을 해야 했다. 사랑니는 예상보다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지 긴 시간의 실랑이 끝에 뿌리가 도중에 절단되고 말았다. 볼은 파랗게 멍이 들고 잇몸은 헝겊처럼 엉망으로 헤졌다. 며칠을 덧나서 치료하다가 사랑니 뿌리를 제거하지 못한 체 지금껏 잇몸 속에 묻고 사는 것이다. 그것은 식별하기 힘들 정도로 조용히 매복되었다가 어느 날 불현듯 드러낼 수 없는 사랑처럼 예리하게 아파 오기도 한다.

'오는 사랑을 어찌 막으리' 근엄하기로 소문난 원로 수필가의 말씀이다. 제자들과의 담소에서 스캔들이니, 로맨스니 하며 중년의 사랑 얘기가 화제로 등장했다는 데 뜻밖인 그분의 말씀을 전해들은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떤 선배님은 못생긴 남자하고는 커피 한잔도 마시기 싫다고 단호히 말했다. 세상일을 달관했을 것 같은 은발이 성성한 연세에 나르시스 같은 이성상을 가슴에 묻고 사시는 듯해 그 정열이 어여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말씀을 생각할 때 왜 하필 붉은 칸나가 떠오르는 것인지. 치아 속에 아무 일 없듯 결속되어 있지만 불현듯 지근지근 잇몸을 쑤셔대며 일탈을 도모하는 사랑니도 칸나빛 같은 정열을 가졌나보다.

고야의 그림 '검은 상복을 입은 초상화'는 미망인이 슬픔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물가에 서있다. 금방이라도 물속에 뛰어들듯 깊은 애수는 위태롭기조차 했다. 적어도 나는 그리 기억하고 있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은 검은 상복차림인 여인의 표정은 작품을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미망인이었지만 고야의 연인이었다. 모델인 알바 공작부인의 손가락 끝에는 숨은 그림 찾기가 흥미롭게 살짝 노출되어 있었다. 검은 상복의 여인은 모래사장을 은근히 가리키며 서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지 낀 그녀의 손가락을 보았지 달을 보지 못했다. 육안으로 설명되지 않는 희미한 그 글씨를 훗날 세인들의 호기심이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엑스레이 촬영으로 판독한 그 글씨는 '오직 고야뿐'이라는 뜨거운 고백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쉽게 범접하지 못하는 검은 상복 속에 앙큼한 관능을 내밀하게 숨기고 있었다. 칸나처럼 .사랑니처럼.

내게 운명 같은 사랑이 찾아온 적이 있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니 앓이 같은 애절한 사랑이 기억나지 않는다. 사랑니처럼 온몸을 다 앓았던 그런 사랑이 있었다면 추억만으로 지금도 행복할까. 문득 오래 묻어두었던 사랑니의 뿌리를 뽑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할일 없이 고민해 본다. 곰삭은 사랑니 무덤을 파헤친다면 비밀이 없는 곳간처럼 허전할 것 같다.

이제 칸나가 뿌리만 남아 동면할 계절이다. 칸나가 보이지 않는 담장은 겨우내 쓸쓸할 것이다. 칸나는 격정적인 꽃빛과 그 많은 방황을 어떻게 숨기고 길고 긴 한겨울을 날까. 칸나가 싹틀 무렵 나는 잇몸을 간질거리며 사랑니가 올라오는 상상에 다시 젖을지도 모른다. 사랑니의 조화,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는가. 변화는 항상 두려움과 기대감을 양립하여 찾아오니 참으로 무모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애당초 사랑니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한 게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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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 가는 길 -김채영-

남목을 지나 주전동 길목 초입에 들어서면 ‘봉수대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나그네를 유혹한다. 봉대산 우거진 숲 사이로 굽어진 황톳길은 바라보기만 해도 고향 길에 들어서는 듯 가슴이 설렌다.
  내가 봉수대로 가는 시간은 거의 저녁 무렵을 택하는 편이다. 휴일 한나절을 집에서 무료하게 보낸 날이나, 손님이 왔을 때, 잠깐 기분 전환할 수 있는 거리로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그곳을 즐겨 찾는 것은 비단 무료함을 잊기 위함은 아니다. 봉수대 가는 길은 미로처럼 굴절된 산길 곳곳에 색다른 묘미가 도사리고 있어 좋았다. 숲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 보기 드문 야생화를 만나기도 한다.

1.8 km인 지척의 숲밖에는 자동차들이 곡예 하듯 질주해 가는데, 숲 속 산짐승들의 은신처는 신선한 충격이다. 산길을 걷다 보면 아기 산토끼가 천진스럽게 놀다가 나를 발견하고 숲 속으로 허둥지둥 몸을 숨긴다. 녀석은 산 까치나 뻐꾸기의 영토에 침범해서 장난스럽게 후루루 날려 보내기도 한다.

  봉수대와 이웃해 있는 봉호사를 만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도시 근교임에도 봉호사는 작고 허름해서 친근감이 더하다. 승당의 슬레이트 지붕 위에는 쌓인 솔잎이 거름되어 비옥한 잡초 밭인데, 마치 무리 지어 핀 풀꽃들로 화관을 쓴 것 같은 형상이었다. 지척은 복잡한 문명의 도시지만 봉호사 주변은 여전히 적막한 첩첩산중이다. 길을 잃고 깊은 산사에 들어온 착각에 빠진다.

하늘과 맞닿은 둔덕에 보랏빛, 하얀빛의 도라지꽃이 어우러져 아스라이 나부낀다. 근대. 아욱. 시금치가 풍성하게 자라는 채마밭에는 버려진 선풍기 두 대가 바람개비처럼 팔랑팔랑 돌아가고 있다. 도시 공터에서 골칫덩이로 방치된 그것들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다. 자연이 너그럽게도 고장 난 선풍기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준 것이리라. 이제 전선을 떠난 선풍기는 보시의 힘으로 돌아가고, 채소들에게 더욱 신선한 바람을 공급하는 중이다.

봉수대로 가기 위해 봉호사 뒤편 섬돌로 괸 네 개의 낮은 계단을 오른다. 소나무 숲 가운데 둥근 돌담이 바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 47호 봉수대이다. 조선시대 세조 때 세워졌다는 이곳의 봉수대는 일반화된 사각형과는 달리 이색적인 원통형이라 거대한 굴뚝을 연상케 한다. 직경이 5m 높이 6m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어 봉수대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곳은 그 옛날 군사 통신 기지인데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유포나 하서 등지에 분포된 연락망과 교신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오늘날 군부대의 써어치 라이트라던가, 야광탄과 비슷한 구실을 한 것이다. 봉화를 피울 때 냄새 없고 오래 타는 짐승의 배설물을 적절하게 활용했던 옛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정확하고 신속한 교신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을 당시의 환호성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안개를 휘감은 바다는 은밀하게 뒤척이고 있어 부드러운 여체의 실루엣처럼 몽환적이다. 목선 몇 척이 간간이 짙은 안개 바다를 넘나들 뿐 하늘과 바다의 경계마저 지워져 버렸다.

조금은 한가한 날, 봉화꾼들은 지금의 나와 같은 모습으로 봉홧둑을 서성였을 것이다. 고독한 초소에서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보며 사랑하는 부모나 아내에게 봉화를 피워 안부를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옛날 우리 집 아궁이는 봉수대였다. 마을 어느 곳에 있어도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로 집안의 움직임을 점칠 수 있었다. 일몰의 시간이면 어머니는 저녁연기를 풀어 우리들을 불러들이시곤 했다. 산과 들에서 놀다 보면 하늘가에 번지는 다정한 언어들. 얘들아 어서 돌아와 저녁 먹어라!

어스름 무렵이면 우리 집 굴뚝으로 다시 한 번 연기가 실타래처럼 피어났다. 밥을 뜸 들이느라 솔가지를 지펴 한소끔 더 끓이는 것이다. 그때쯤이면 우리들은 하던 놀이를 접어 두고 바쁘게 동산을 내려오곤 했다. 밥 자치는 연기가 재촉같이 느껴졌다. 잘 마른 보릿대나 장작, 향긋한 솔가지, 가랑잎을 태우던 저녁연기는 가정의 안식을 알리는 평화로운 교신이었다. 들일을 하던 아버지도, 나무를 하러 갔던 큰오빠도 까만 굴뚝으로 연신 피어오르는 저녁연기를 바라보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언젠가는 우리 집에서 어둑해지도록 굴뚝에 연기가 오르지 않았다. 허기져서 돌아오니 어머니는 그날따라 늦은 저녁을 짓고 계셨는데, 굴뚝에 연기가 빠지지 않아 아궁이로 모두 토해 내고 있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병이 깊어 자리에 누워 있었으니 굴뚝이 막혀도 고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주 약제를 구하러 간 어머니가 늦도록 부재중이면 제 때에 밥을 짓지 못하는 일도 허다했다. 굴뚝에 연기가 잘 빠져야 가정이 평탄하다는 작은 지론을 나는 아주 어려서 체득한 셈이다. 그 시절, 연기가 자욱한 부엌에 앉아 풀무질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농담이 흐릿해진 낡은 흑백사진처럼 아련하게 가슴속에 남아 있다.

이내가 남빛으로 저문 하늘가를 덮을 무렵이면 나는 견딜 수 없이 봉수대에 오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옛날 어머니의 밥 짓는 연기가 그리운 까닭이다. 그날을 생각하면 금세 연기가 쑥쑥 빠지던 고향집 굴뚝이 어른거리고, 나는 그 풍경에 깊이 빠져들어 간다. 호롱불 아래, 두레반에 둘러앉은 식구들의 달그락거리는 여섯 개의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웃음소리의 여음이 잔잔하게 깔린다. 문밖에 있는 나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기에 내밀한 추억의 그 방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

그날의 어머니처럼 나 또한 봉화를 피워 그리운 사람을 불러들이고 싶다. 세상살이가 바쁘다는 이유로 멀어진 사람들에게 이제는 안부를 전하고 싶다. 객지 생활 십 여 년에 접어들었으니 내 가슴은 메말라 어쩌면 횃불은 더욱 열정적으로 활활 타오르지나 않을까.

주전동 원통형 봉수대를 닮은 내 몸 속에도 작은 봉수대가 하나 있다. 그리하여 저녁만 되면 견딜 수 없는 귀소 본능으로 명징한 횃불 하나를 지피고 싶은 것이다. 봉수대에서 가장 위급할 때의 통신을 할까? 외로워서 못살겠음. 그리운 사람 급히 연락 요망. 아니다. 5봉 5수는 적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알리는 신호였으니 너무 파격적이다. 1봉 1수로 낮춰야겠다. 그래도 생활 전선 아무 이상 없음이라고.







불꽃같이 번져가는 감동의 순간 [2]
장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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