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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珍 박 기 옥
3월이 되고 중순이 넘었는데도 고르지 못한 날씨 탓인지 바람이 차다. 전문가들은 뭉뚱그려 ‘이상기온’으로 치부하지만 시인들은 ‘꽃샘바람’이니 ‘하늬바람’으로 이름을 붙여 부른다. 천재성이 돋보이는 작명가들이다.
이른 아침. 도심지 공원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공원 야산에는 벌써 꽃이 피기 시작했다. 꽃샘바람이 불든 하늬바람이 불든 꽃은 피게 되어 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그들은 이미 누군가에게 ‘꽃’이라 불리고 말았으므로. 꽃은 피어야 비로소 꽃인 것이다. 지는 꽃과 피는 꽃이 어우러져서 봄바람을 타고 흩날린다.
사람들은 어느새 겨우내 추위에 갇혀있던 두꺼운 옷을 벗어던졌다. 성급한 젊은이들은 아예 조깅복으로 갈아입기도 했다. 운동 삼아 걷기에 좋은 계절이 된 것이다. 앞서거니 뒤따르거니 열심히 걷는다. 산에서는 누구나 금새 친해지기 마련이다. 나이도 성별도 계급도 없다. 만나는 사람마다 웃음 띤 얼굴로 말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날씨 좋군요. 혼자 오셨나 봐요.
나의 경우 걷기는 생각의 연장이다. 생각이 막힐 때 머리가 혼란스러울 때 나는 곧잘 운동화를 신는다. 몸을 움직여야 생각이 정리되는 것은 일종의 습관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마라토너이고 김훈이 자전거 레이서라는 사실은 나로서는 은근히 기분 좋은 일이다. 그들에 비한다면 나야 겨우 보행자일 뿐이지만‘생각’을 위해 ‘몸’을 즐겨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독일 신경학계에서 발표한 ‘히포캄포스(Hippocampus) 연구’도 마음에 든다. 인간의 뇌 속에 있는 히포캄포스는 와이셔츠 단추만한 크기지만 뇌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이라고 한다. 이것은 뇌에서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수행한다.
또한 이 신경세포는 같은 박자 혹은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는 특징이 있어서 걷거나 달릴 때 뇌의 활동이 가장 잘 촉진된다는 것이다. 히포캄포스의 작업 리듬 자체가 걸을 때의 리듬과 같다는 뜻이다. 사실 인간이 인간으로 된 것이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시점부터라면 걷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예술작품에서는 왜 하나같이 생각하는 자세가 고정되어 있을까? 생각하는 작업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는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손목을 꺾어 턱을 받치고 있다.
‘인간의 손으로는 만들 수 없는 신의 작품’이라는 <반가사유상>도 다리 하나를 꺾어 올리고 상체를 올곧게 세우고 있다. 또한 20세기의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백남준은 좌선하는 부처를 아예 TV 모니터 앞에 앉혀 놓았다.
시험 삼아 이 자세들을 한 번 흉내 내어 보라. 누구라도 얼마 못 가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예술적 몸자세에는 실제로는 생각의 주체나 의미를 표현하기 보다는 조각미디어의 미적통념이 반영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해가 떠오르자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욱 활기에 차오른다. 로뎅의 모델이 아니라서 행복한 나는 팔을 쭉쭉 뻗으며 가슴을 펴고 앞으로 나아간다.
일찍이 니체는 “자유로운 운동으로 태어나지 않은 사상에 믿음을 주지 마라”고 했다. 프랑스의 몽테뉴도 “앉아 있으면 내 사상은 졸고 움직이지 않으면 내 정신은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던가. 소크라테스도 칸트도 평생 산책을 하며 철학을 했던 사람들이다.
나 같은 범인이야 산책을 한들 철학이 나올 리 만무하다. 그러나 걷는 동안 막혔던 논리가 트이고 실타래처럼 엉켰던 상념들이 풀렸던 경험은 적지 않다. 몸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준 덕분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사고도 몸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손으로 글을 쓸 때 생각이 손을 따라가던 것이 컴퓨터로 글을 쓰면 생각도 컴퓨터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 그러하다. 걸으면서 생각하면 생각 역시 걷는 만큼 나아가게 되는 이치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걷느라 흘린 땀을 가볍게 닦으면서 선채로 커피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다. 더러는 근처 밭에서 뜯어 파는 채소를 아침 반찬용으로 사 가기도 한다.
미나리가 싱싱해 보이기에 눈을 주고 있는데 휴대폰 벨이 울린다. 친정 아버지다. 너는 매일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꼴로 봐서 글은 길에서 쓰는 모양이라고 핀잔이 대단하다.
그럼요, 길에서 쓰지요. 나는 큰 소리로 대답한다. 그 연세에는 글은 모름지기 골방에서 문 닫아걸고 써야 하는 줄 아는 모양이다. 길에서 쓰는 글이 얼마나 좋은 건데. 몸과 땀이 묻어나야 살아있는 글이지.
나는 다시 가슴을 펴고 집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http://blog.daum.net/gopark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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