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여권 / 김현자
내가 처음 여권을 손에 쥔 것은 1951년 5월이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있을 때였다. 길에는 피난민들이 넘쳐흐르고 사람들은 잠시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전국 속에서 공포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국내여행도 자유롭지 못했던 그 시절에 내가 미국 행 여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의 미국행은 내가 관계하던 국제 여성단체의 미국본부에서 여권에 필요한 일체의 서류를 보내옴으로써 가능했었다.
임시수도 부산의 외무부에서 한 직원이 졸업장처럼 생긴 종이 한 장을 건네주면서 “여권을 받으시오. 당신은 20세기의 행운아요.”하고 말했을 때도 나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나는 그 때까지 여권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일이 없었다. 여권에는 가는 나라의 비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당시 비행기는 모두 자리가 넓은 일등석이었으나 제트기가 아닌 프로펠러 비행기여서 기체가 몹시 흔들렸다. 하늘에 높이 치솟는가 하면 수 미터 아래로 곤두박질하기를 거듭했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로 첫 기항지인 미네소다 공항에 내렸을 때였다. 내가 출입국 관리에게 여권을 펴 보이는 순간 카메라를 든 남자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어댔다. 나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 사진이 나오고 설명을 듣고서야 그 연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뉴스의 초점이 되어있는 한국전쟁, 그 와중에서 빠져나온 촌스런 한복차림의 소녀, 그가 지닌 종이 한 장의 여권, 이것은 뉴스거리가 되기에 족했던 것이다.
뉴욕에서의 대학원 생활과 연수프로그램을 마치고 귀국할 때가 다가왔다. 이 때 귀국을 앞둔 나에게 나의 스폰서인 미국YWCA는 실로 놀라운 계획을 내 놓았다. 귀국길에 인도에서 열리는 세계기독청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할 것이며, 가는 방법은 미국대표들과 함께 퀸 엘리자베스 호를 타고 유럽에 건너가 프랑스, 독일 등 6개국을 순방하고, 영국에서 지중해를 건너 인도에 갈 것이며, 그곳서 회의를 다 마친 후에는 혼자서 비행기로 동남아 4개국 YWCA를 순방하고 귀국한다는 실로 엄청난 계획이었다. 4개월 가까이 되는 환상적인 세계일주 여행이었다. 이때는 배를 타는 것이 비행기보다 비용이 덜 드는 때였다.
세계일주를 위한 준비를 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뉴욕에 있는 각국 영사관을 찾아 비자를 얻는 일은 국제부 직원이 도와주었다. 문제는 한 장의 여권에 여러나라의 비자를 받을 공간이 없는 것이었다. 결국 내 여권의 상단에 십여장의 소형 백지가 호찌기스로 꽉 눌러져 부착되었다. 그리고 매장마다 방문하는 나라의 비자 도장이 찍혔다. 그것은 내가 보아도 참 가관(可觀)이었다. 초라하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여권. 그러나 내게는 귀하고도 자랑스런 내 나라 여권이었다.
20여명의 미국대표들과의 유럽여행은 즐거웠다. 그들은 유일한 외국인인 나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대했다. 내 여권을 보고도 웃지 않았다. 그러나 내 여권은 가는 곳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느나라에 도착하든 세관을 통과할 때면 내 불쌍한 여권은 구경거리가 되어 킬킬거리는 웃음 속에 세관 안을 한바퀴 돌고 나오는 것이었다.
프랑스 방문을 마치고 기차로 네달랜드를 횡단하던 때였다. 국경인 듯한 어느 도시 역에 도착하니 세관원들이 올라와 여권검사를 시작했다. 나는 이미 손때가 묻고 모서리가 닳기 시작한 여권을 내밀었다. 여권을 받아 쥔 세관원이 비자용지를 이리저리 뒤져보다가 심학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날보고 비자가 없으니 다음역에서 내리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미국대표 인솔자인 찰리가 이곳은 기차로 통과만 하는 곳이라 비자가 필요 없을 텐데 라고 말을 해도 세관은 내려서 비자를 받아야 한다고 우겼다. “누구 같이 내릴 사람 없나”라는 인솔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남학생이 손을 들고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생각나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거의 울상이 되어버린 나는 그와 함께 기차를 내렸다. 일행의 근심스런 눈길을 등 뒤로 느끼며, 또 약소국의 비애를 온몸으로 통감하며 역 사무실로 들어갔다. 한 세관원이 내 여권을 들고 급히 여러 곳에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 한 30분 정도가 지났을 때 세관원이 환한 얼굴로 다가와 이제 비자도장을 찍었으니 다음 기차로 목적지에 가면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한시간 쯤 기다리다 기차를 타고 목적지인 항구도시 헤이그 역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우리 일행이 환호와 박수를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 경험은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어 여권을 볼 때면 그 때의 비참했던 기억이 떠 올라오곤 한다. 연 전에 외무장관을 지낸 분을 만난 자리에서 이 때의 내 여권이야기를 했더니 크게 관심을 보이며 그 여권이 있으면 외무부에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내 부주의로 수년전에 그 여권을 분실하고 만 것이다. 전시에 발행한 종이 한 장짜리 여권은 그 수가 적어 아마도 박물관 소장품이 될 수도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내 첫 번째 여권은 행운의 여권이었다고 믿는다.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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