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맛 / 조한금
목포에 사는 친구 딸애의 혼인날이다. 버스로 6시간을 달려가야 하는 장거리, 고속버스를 타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섰다. 여행이란 목적이야 어쨌든 즐거운 것이다.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의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며 한가로이 영혼을 치장할 수 있는 시간이지 않는가. 로마에서 나폴리를 향해 달리는 고속도로 주변이 결코 우리의 경부고속도로변 보다 더 아름답지 않았음을 떠올리며 그 곳보다 더 빼어난 경관의 우리 강산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눈여겨본다.
길옆의 주변 마을이며 야산이 잎으로 꽃으로 피어 울긋불긋 곱다. 모처럼 마음이 유유자적해져 안락한 봄의 품속으로 나들이 나선 것 같은 여유를 맛본다. 사실 나는 그동안 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미처 좋아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게 더 솔직한 고백이리라.
어릴 때의 내 봄들은 거의 어른들의 한숨 속에서 춘궁기의 보릿고개로 넘겼기에 ‘봄 맛’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끼니에 봄나물을 식탁에 올려야했던 가난한 봄은 그저 궁하고 지루한 계절일 뿐이었다. 여름은 껄끄러운 보리타작과 땡볕의 노동을 시중들며 보냈고,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혹한의 겨울은, 방 한구석에 고구마를 저장해놓고 양식에 보태먹으며 겨우살이 걱정을 내가 해야 할 만큼 일찍 철난 애어른이었으니 당연히 싫을 수밖에…. 그래서 나는 풍성한 수확의 가을을 더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가을걷이를 끝낸 구레나룻 면도자국 같은 푸릇한 그루터기의 텅 빈 들녘과, 스산한 바람에 서걱이는 갈대와 풀벌레 울음소리, 휘영청 높게 뜬 차가운 만월과 그 빛에 반사된 야산의 포르스름한 옥양목 빛 구절초, 그리고 밤바다의 철썩이는 해조음의 그 괴괴함까지를 내 것으로 사유하며 그런 가을만의 멋과 맛을 즐겼으니, 그런 가을을 닮아 혹 내 성품이 차가운 것은 아닐는지.
그런데 나는 이제야 봄 속에 깊이 들어와 보며 “봄은 참 좋은 계절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 딸아이 혼사에 가면서 비로소 봄을 깨닫는다면 나는 얼마나 세월을 잘못 산 셈인가. 새삼 놓친 봄들이 아쉽고 아까운 생각이 든다.
버스는 마을 어귀들을 당겼다 놓았다 하면서 언뜻언뜻 지나치는데 펑퍼짐하게 자리 잡은 터주 목들이 저마다 꽃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잰걸음으로 급히 내게 다가와 인사하고 물러선다. 숫제 길 양옆 가로수로 늘어선 벚꽃 터널은 뭉게구름을 피워내 환상적인 봄을 통째로 선물하며 봄 속을 뚫고 가도록 배려하기도 한다. 앞산 자락의 송림사이로 숨었다 보였다하며 숨바꼭질하자는 진달래 군락의 상기된 얼굴도 정겹고, 먼발치로 보이는 마을 뒷산에 연기인 듯 피어오른 배꽃 또한 한 폭의 그림이다.
나는 비로소 봄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생각에 잠긴다. 그저 바쁘다는 핑계로 그렇게 보내버린 무수한 봄들, 이제야 애정을 갖고 마음으로 봄을 보니 그 동안 수없이 나를 향해 손짓하며 말을 걸어왔음을 뒤늦게 헤아린다. 그렇다면 살아오는 동안도 나를 향한 봄 같은 마음들이 무수히 있었을 터, 그 곱고 따사롭고 아름다운 누군가의 마음들을 아직도 못 읽어 섭섭하게 하진 않았을까. 있으리라. 있어도 아주 많이 있었으리라. 그랬다면 둔해서 저지른 잘못이니 모두모두 나를 용서해주기를 빌 뿐이다. 이제야 눈 돌릴 마음의 여유를 얻었으니 그래서 지명인가보다.
봄에 꽃으로 잎으로 피어난 수많은 봄의 주역들의 수종을 다 알 순 없지만 봄의 가인이라 불리는 목련에서부터 마주봐야 결실을 맺는 금슬 좋은 은행나무도 있으니 그네들의 세계도 우리 인간사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생각하며 나는 나무들을 의인화 해본다.
하얀 백설의 무대 위에서 독야청청 겨울 솔바람을 열창하는 소나무를 바리톤 가수에 견주어 본다면, 봄 무대 위에 아이보리 빛 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입고 봄의 미풍을 노래하는 목련은 오페라의 프리마돈나가 아닐까. 나는 한껏 상상의 날개를 펴고 봄에 잔뜩 취해 배고픔도 잊은 채 짐짓 나를 돌아다보았다.
흔히 인생을 사계로 나눈다. 문득 내 인생의 계절을 가늠해 본다. 어느덧 가을이다. 그것도 늦가을에 와 있는 것이다. 추수할 것이 많아 풍성한 가을이 좋다던 나는 정작 내 들판을 둘러보며 실망한다. 허허롭기 그지없다. 뿌리고 가꾼 것이 별로 없으니 추수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곳저곳에 가서 이삭이라도 부지런히 주워 와야 그나마 추운 겨울을 보낼 테니 이 늦가을의 나는 얼마나 허둥지둥 바빠야 하는가.
차창 유리의 따사로움에 기대고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잠깐 잠들다 깨어보니 어느덧 목포에 도착했다. 모두가 이웃이고 모두가 친구로 20년을 터 잡고 살았던 소도시가 나를 반긴다. 친구 딸아이의 결혼식장 안은 방명록에 사인하는 사람들로 온통 붐비고 있었다. 하객들의 인사 받기에 여념이 없는 친구내외를 보며 그들이 이 지역에 쌓아올린 업적과 교류가 대단했음을 확인한다. 이제 새롭게 한 가정을 시작하는 신랑신부의 화사한 봄을 보며 봄 같은 오늘의 행복이 평생 지속되기를 나는 마음속으로 축원해준다.
이 고장 떠난 지 벌써 15년 여, 그 동안 잊고 살았던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니 그들이 내 손을 아프도록 쥐고 흔든다. 가슴 찡한 정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들러볼 집도 많고 찾아볼 사람도 많지만 시간이 없으니 도둑괭이처럼 살짝 다녀가야 하는 일이 마음에 걸린다. 그들은 내 생활에 늘 봄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헤어지기 서운해 더 쉬었다 가라고 붙잡는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훗날을 기약하고 돌아서 상행선 기차에 올랐다. 올 때와는 다른 석양노을을 동반하고 기차의 창가에 기대앉아 끊겼던 생각들을 다시 이어본다.
앞으로 맞을 내봄은 몇 번이나 더 남았으며 그동안 내 봄이 되어준 무수한 마음들에게는 어떻게 보답할까. 이제 봄맛을 안 이상 더는 봄을 무의미하게 보내진 말아야겠지. 나도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봄이 되어 그들의 해동을 말없이 지켜보리라.
우리 시골집의 뜰처럼, 내 안의 언 땅이 녹아 노란 산수유가 이른 봄을 피우고, 해맑은 산 목련이 봄을 노래하며 조팝꽃이 흐드러지는 향기로운 봄 뜰로 가꿔, 모든 이와 함께 봄을 나누며 즐겨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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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도 창작수필로 등단,
남편의 회갑기념으로 같은 제목의 남편 최건 기행시집과
조한금 기행수필집 <눈으로 가고 발로 보고>을 2001년도 출판한바 있습니다.
그리고 2007년 6월 결혼 40주년 기념으로 저는 <멋지게 베팅하라>수필집과
남편은 <허물어뜨려 비우고 다시 세워 채우는>시집을 상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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