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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다니던 길
이 영숙
사람이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이 눈비를 막아주고 밤이면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을 보금자리라고 한다.
십 수 년 만에 근근이 마련한 아파트가 다행스럽게도, 집 앞 쪽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사시사철 흐르는 학운천이 있고, 집 뒤쪽으로는 충의약수터가 있는 산이 있다. 이런 곳을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은 집터라고 일컫는다. 운동 삼아 평지를 걷고 싶으면 조붓한 개울을 끼고 자전거 도로를 따라 물들의 속삭임에 귀기울리여 한 없이 걸어 보기도 한다. 개울가엔 버들강아지가 제일 먼저 봄소식을 알린다. 사람들과 어깨를 살짝살짝 부딪치며 눈인사를 하며 조깅을 하는 것이 싫증나면 다음날은 배낭을 걸머지고 뒷산으로 오른다. 아카시아 나무가 울창한 숲을 깊숙이 걸어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약수터가 보이곤 한다. 약수터 위쪽에 있는 치마바위는 많은 세월의 풍화작용에도 늘 같은 모습이다. 맑은 날 바위에 올라서면 인천앞바다가 손바닥만 하게 보인다.
눈을 돌려 안양 시내를 바라보면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습관처럼 나는 어느 동에 있는 어느 아파트인가를 알아맞히느라 시간을 허비하곤 한다. 이렇게 물과 산을 끼고 살 수 있는 것도 내가 누릴 수 있는 작은 행운이다. 봄 산을 오르내리며 만나는 아카시아 꽃들이 정겹다. 하얀 꽃들이 소담스럽게 피어 가지가 무거워 보인다. 고향의 뒷산에 와 있는 듯 심신이 편안해진다. 아카시아는 5월부터 꽃이 피어 달콤한 향기로 꿀벌들을 유혹하면 벌들은 꽃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야단법석이다. 밥을 뭉쳐 놓은 듯이 소담스러운 꽃들은 지나가던 짓궂은 바람이 한 번씩 용트림을 하면 바로 꽃비가 되어 너울거리다가 나무의 발을 하얗게 덮곤 한다.
어느 해부턴지 우리 집 거실까지 날아오던 꽃향기가 감감 무소식이다. 길을 잃었나보다. 우리아파트 옆에 대단지 아파트가 생기면서부터 꽃향기가 아파트 벽에 부딪쳐 이제 더 이상 우리 집까지 날아 올 수가 없는 상황인가보다. 아카시아 꽃 예찬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고속도로를 내느라 산이 파괴되어 산에 사는 짐승이나 개구리들이 길을 잃고 죽음을 당하는 일이 자주 있다.
다행스럽게 청계산입구에 가면 개구리가 다치지 않게 건너다닐 수 있도록 길을 터놓았다,
이제 아카시아꽃향기가 자유로이 날아다닐 수 있도록 바람 길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 같다. 이봄, 고향의 향수 같은 아카시아꽃 냄새 맡으러 산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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