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적막
- 임윤희
길 가다가 사람을 보는 것보다 다람쥐 보는 것이 더 쉽다. 일부러 주택가로 산책을 가지만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다. 집 앞 뒤 너른 잔디밭에 백년은 됨직한 나무들 사이로 뻔질나게 오가는 다람쥐들과 쉴새없이 지저귀며 날아다니는 새들뿐이다. 적막강산이다. 그들도 그걸 알아서 저토록 부산하게 기척이며 소리를 내는 걸까.
나는 미조리에 와서 마음 속 깊이 적막함을 느낀다. 미조리에는 여러 개의 도시가 있는데 내가 사는 곳은 콜롬비아 도시다. 콜롬비아 도시엔 약 7만 정도의 인구가 사는데 면적은 서울시의 면적을 능가한단다. 면적에 비해 적은 인구가 살고 있어서인지 곳곳마다 빈땅이 산재해 있다. 확 트인 벌판을 지날 때마다 그곳에 예술품 같은 미국 집 한 채 지어 살고 싶다.
콜롬비아 도시라고 명명하지만 전혀 도시 같은 분위기는 느끼지 못한다. 웅장하고 거대한 도시의 면모를 갖춘 센트 루이스나, 스프링 필드, 제퍼슨 시티, 켄사스 시티에 비해 그 중 작은 도시다. 그래서인지 높이 치솟은 건물은 교회 종탑과 굴뚝들뿐, 대개가 얕은 건물이다. 그런 건물은 정숙한 여인의 분위기처럼 단정해 보인다. 다운타운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거나 복잡하거나 잡음이 있거나 하지 않다. 아무런 노점상도 광고판도 어떤 선전문구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시내인지 주택가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한적하다. 거리에 사람이 없기는 시내도 마찬가지다. 의외이다. 최고의 문명의 나라 한 쪽에서 나는 문명의 이기를 벗어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대륙이어서 일까. 산도 없다. 언덕이라고도 할 수 없는 낮은 구릉과 골짜기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바다에서만 볼 수 있었던 지평선을 나는 안방 창문을 통해 본다. 그것을 볼 때마다 여기가 전망 좋은 해변가의 호텔인지, 언덕 위의 고풍스런 산장인지 착각 속에 빠진다. 아득한 곳에 지평선이 저녁노을 빛에 윤곽을 드러낸다. 저녁노을은 장관이다. 마음까지 물들일 듯 아니 태워버릴 듯한 열정적인 노을은 여기서 처음 본다. 한 날의 절정을 저렇게 장식하는 걸까. 온 산마다 핏빛 단풍이 든 것처럼 노을 빛은 남서북쪽 스카이라인까지 물들이고 있다. 이리가도 저리가도 끝이 없는 아득함, 오직 저녁노을에 불타는 스카이라인만이 그 정점을 알려주는 것 같다.
한 밤중, 지척에 있는 주택가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어떤가. 꼭 아늑한 산골짝 작은 집에서 흐르는 등잔불빛 같다. 대문을 두드리면 정다운 목소리가 들릴 것 같은 불빛들. 그 아련한 불빛 속에서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어리기도 하고, 고래뱃속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 피노키오 아버지의 잔영이 그려지기도 하고, 석봉 어머니의 다시 돌아가라는 엄한 음성도 들려오는 것 같다.
유난히 나무가 많은 이 도시, 집이 있는 곳마다 수령이 오래된 우람한 나무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나뭇잎이 피면 온통 푸른 숲이 된다는 이곳, 아직은 채 잎을 피우기 전이어서 그들의 모습은 적막하기 짝이 없다. 그들을 바라보면 삶을 초월한 선승이나 철학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적막하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꽤 오랫동안 적막함을 모르고 살았다. 언제부터 감각이 무디어졌는지 그 무엇을 봐도 별 느낌이 없었다. 예전엔 미풍도 의식하는 나뭇잎처럼 감정의 여울에 얼마나 가슴이 떨렸던가. 슬픔과 기쁨, 그리움과 정다움의 교차 속에서 흥분을 참지 못했던가. 그런데 도통 그런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웬일일까. 그 동안 정신없이 분주하게 살았기 때문일까. 남들보다 별로 해놓은 것도 없으면서 참 바쁘게 살았다. 가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될 하등의 쓸데없는 것에 온 몸과 마음을 던졌다. 혹시 거기에서 제외되면 낙오라도 될까봐 안깐힘을 쓰며, 신경쓰며, 참견하며, 살았다. 또한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온갖 사물들과 광고판, 도배된 선전문구들, 크고 작은 소음들은 혼란에 빠지게 했다. 이들은 마음의 느낌이나 생각, 감성까지 마비시켜 놓았다.
그와는 달리 이곳은 너무나 조용하다. 어떤 소음이나 잡음, 복잡함이 없다. 한 눈 팔거나 정신을 빼앗길 인위적인 어떤 대상물도 없다. 그 누구 하나 불러주는 사람도, 부를 사람도, 만날 친구도, 내가 끼어 들 소속도 없다. 외딴 섬에 표류하고 있는 듯, 깊은 산 속에 갇혀있는 듯하다. 어떤 선생님 부인은 이곳에서 사는 것이 너무 심심하고 따분해 귀국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단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파리 날리는 소리도 벌레 움직이는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이곳, 투영된 나를 만나며 적막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이 좋다.
느낌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러나 외부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가 보다. 한적한 환경 속에 처하게 되니 마음속의 느낌을 감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소리까지 들리는 듯하다. 그 동안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모든 감각기관이 기지개를 켜며 깨어난다. 비로소 눈에 스치는 사물 하나 하나에서 가슴 속 깊이 파고드는 적막을 느낀다.
적막은 고요함과 쓸쓸함, 외로움의 이미지다. 그 이미지 속에는 그리움도, 슬픔도, 쾌감도, 정다움도 포함되어 있다. 가만히 그 물결을 타다보면 절벽에 선 것 같은 아슬아슬함도 맛보지만 대체로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진다. 마치 용광로에서 제련되어 새 상품이 나오듯이 적막의 아릿한 아픔 속에서 마음이 정화되어 맑아짐을 느낀다. 이런 적막의 느낌이 신선하다.
봄이 가까이 오나보다. 새들 노래 소리가 더 명랑해졌고, 생기 찬 다람쥐들이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온다. 머잖아 꽃들이 피어나고 푸른 잎이 돋아날 것이다. 집집마다 굳게 닫혔던 브라인드나 커텐이 걷히고 창문이 열릴 것이며, 사람들도 어슬렁댈 것이다. 그래도 적막의 이미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리라. 자연 속에서 낯선 자유를 느낀다(strange liberty in nature)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ivid thoreau)의 말처럼 나는 또 다른 낯선 적막을 이곳에서 느끼게 되지 않을까.
* sysop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8-30 16:51)
* sysop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9-04 09:48) |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