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소생
유혜자(柳惠子)
지난 10월 볼쇼이발레단의 ‘지젤’공연 안내를 들으며, 10년 전 이맘때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던 이웃나라에서 본 보랏빛 라벤다 꽃밭과 발레영화 ‘지젤’을 생각했다. 지금은 CF에도 넓은 라벤다 밭이 나오고 그 약효도 알려졌지만 보기 어려웠던 때였다. 기절한 사람도 회복시킨다는 둥 여러 가지 신비한 효능과 유래가 있는 라벤다 꽃이 무척 궁금했었다.
여행 이틀째 날 유적지 관광을 일찍 마쳐서 숙소로 가는 길에 선인장과 라벤다가 있는 농장에 들른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대를 했던지. 자동차가 산자락을 돌 때쯤 멀리 보랏빛 꽃밭자락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내 가슴엔 잔 파도가 밀려왔다. 드높은 하늘아래 널따랗게 펼쳐진 꽃밭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는 차안의 일행들이 탄성을 질렀었다. 정작 코앞의 꽃송이를 대하니 요염한 꽃이라기 보다는 보랏빛 수숫대 같아 실망을 했다. 그러나 실망의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우리를 붙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은은한 향내, 가을의 향기라고 이름할 수 있는 은은한 향내가 바람에 감돌았다. 그 향내는 뜨겁고 지루한 여름을 지나고 늦은 휴가를 떠났던 우리에게 여름의 땀 냄새를 가셔주고 열기를 식혀주었다.
그날 밤 숙소에서는 뜻밖에도 발레영화‘지젤’을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라인강변의 숲 속을 배경으로 청순하고 아름다운 처녀 지젤과 평민을 가장한 귀족 알브레히드, 그들이 사랑에 빠져 술래잡기하듯 정다운 장면을 생각하며 TV앞에 앉았었다. 세계적인 발레리나 나탈리아 마카로바와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니시코프 주연의 영화 ‘지젤’이었다.
요즈음도 이따금 발레음악이 수록된 CD를 듣고 있다. 음악을 들으며 로맨틱한 춤과 아름답고 신비한 배경들을 떠올려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39편이나 되는 오페라를 작곡한 프랑스의 작곡가 아당(Adolphe Charles Adam 1803-1856)은 발레음악도 14곡이나 작곡했는데 오늘날엔 ‘지젤’ 한 곡만 전해오고 이 한 곡으로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다. ‘지젤’은 이전의 발레음악들이 가벼운 춤곡을 모아놓은 단순한 음악이던 것과 달리 사랑을 엮어 가는 스토리와 무용을 위한 음악이다. 아당은 등장인물의 성격과 이야기에 꼭 들어맞는 ‘지젤’을 작곡하여 근대 발레음악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1831년에 있었던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의 ‘지젤’ 초연 때 관중들은 신기한 모습에 들뜨게 되었다. 그때까지 보아온 것과는 다른 발레리나의 날렵한 의상과 신발, 동작에 놀란 것이다. 쫙 펴진 우산모양의 겹으로 된 스커트인 튜튜를 입은 발레리나, 그리고 굽이 없는 무용화를 신고 발끝으로만 종종종종 스텝을 밟다가 미끄러지듯 춤추는 모습에 관중들은 환호했다. 게다가 오페라보다 흥미로운 극적인 얘기와 아름다운 음악에 더욱 매혹될 수밖에 없었다.
독일에는 춤을 좋아하다 죽은 처녀귀신의 정령 ‘빌리’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빌리는 밤마다 무덤에서 빠져 나와 젊은 사람을 유혹해서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한다. 작가 데오피유 고티에가 이 전설을 바탕으로 그가 연모한 발레리나 카를로타 그리지를 위해 지젤의 대본을 썼다.
청순한 지젤은 평민을 가장한 귀족 알브레히드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 마을에는 지젤을 짝사랑하고 있는 시골청년 힐라리온이 있었다. 그에게서 알브레히드가 약혼녀가 있는 귀족이란 사실을 들은 지젤은 충격으로 자살을 한다. 그녀가 죽자 알브레히드와 힐라리온은 지젤의 죽음이 서로의 잘못이라고 우겨댄다. 두 사람은 지젤을 죽음으로 몰았던 것을 후회하며 지젤의 무덤을 찾아간다. 환상적인 숲 속에 밤이 되면 빌리들이 무덤에서 나와 밤새 춤을 추다 새벽이 되면 자기 무덤 속으로 들어간다. 빌리들은 지젤의 무덤 앞에 있는 힐라리온을 계속 춤추게 하여 지쳐서 연못에 빠져죽게 한 뒤, 알브레히드에게도 계속 춤추게 한다. 이때 지젤이 나타나 빌리의 여왕에게 알브레히드를 살려달라고 간청하나 여왕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알브레히드와 지젤이 밤새도록 격정적으로 춤을 추어 지쳐서 죽게 된 무렵,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와 알브레히드는 죽음 직전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아당은 이 대본을 보고 오묘한 이야기에 반해서 일주일만에 작곡을 끝냈다고 한다.
내가 본 마카로바와 바리시니코프 주연의 영화 ‘지젤’은 바람에 떨리는 꽃잎의 미세한 떨림이나 광풍에 휘몰리는 동작까지 뛰어난 연기력의 콤비를 이뤘다. 게다가 환상적인 배경으로 영상미도 뛰어났었다. 이 대본은 작가가 사랑하는 발레리나를 위해 썼으니 다양한 춤과 뛰어난 심리적인 묘사로 여주인공을 돋보이게 했으리라. 불 속으로 빠져드는 불나비같이 알브레히드에 반해서 어쩔 줄 모르는 지젤의 미묘한 동작과 그녀가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춤추는 처연한 장면은 가슴이 아릿했다.
피로회복에도 도움이 되고 기절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라벤다 향은 진정효과도 있어서 동물원의 사자나 호랑이 코에다 살짝 발라서 그 동물들을 순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오늘날 무분별하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파멸시키려는 이나 눈앞의 이익만을 쫓는 사랑의 순례자들에게 라벤다 향으로 균형을 잡게 할 수 있을까.
지젤 음악의 CD는 무용장면도 없이 길게 계속되어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지젤의 순수하고 고귀한 영혼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속였던 알브레히드, 자신과의 맺어짐은 포기했지만 그를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순수한 지젤의 사랑. 발레를 못 본 사람에겐 음악이라도 들려줘서 기절한 사람을 회복시켜준다는 라벤다 향처럼 스러진 사랑을 소생시켜주고 싶은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 동국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전) MBC라디오프로듀서
* <수필문학>(1972년 12월호)에 '청개구리의 변명'으로 데뷔.
수필집'돌아오지 않는 메아리'(1972), '거울 속의 손님'(1977). '세월 의 옆모습'(1982), '어머니의 산울림'(1985), '절반은 그리움 절 반은 바람'(1992), '자유의 금빛날개'(2002)
음악에세이 '음악의 숲에서'(1998), 차 한잔의 음악읽기'(2004)
'제4회 현대수필문학상'(1982),'제29회 한국문학상'(1992) 제18회 펜 문학상(2002)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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