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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에 담긴 우정
김 규 련
K형, 오늘 모처럼 틈이 있어 후미진 일월산 계곡을 배회해 봅니다. 아청빛 하늘을 이고 장엄히 펼쳐진 수림의 바다에도 벌써 여기저기 단풍이 깃들고 있습니다. 지난 번 보내주신 엽서 잘 받았습니다. 엽서에 담긴 지순의 우정에 감동되어 몇 번 거듭 읽어봤는지 모릅니다.
안부를 묻는 담담한 글귀 속에서 형의 목소리며 체취 같은 것을 듣고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시방 나는 비음(鼻音)으로 <동심초>를 노래하며 산비탈 하얀 메밀꽃밭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저마다 고독과 단절과 소외의 상황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분주하고 화려하지만 내면으로는 늘 외롭고 슬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눈물이며 정의 미학이며 아름다운 산야가 있어 그것이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만나보면 역시 그저 그렇고 그래도 아니 오면 문득 생각나는 그대(相見亦無事 不來忽億君)”가을 하늘 같은 이 마음은 우리들의 오랜 멋이요, 자랑이었습니다.
K형, 땅거미가 깔리는 산기슭에 외딴집 한 채가 보입니다. 문득 S암자에서 불경을 읽으며 사상(四相)을 버리는 공부를 해보자고 철없이 둘이서 다짐하던 그때가 엊그제 같구료. 그러나 세월은 흘러갔습니다.
나는 흐르는 시류에 따라 많은 영욕의 산맥을 넘고 애환의 강을 건너 지금 만신창이의 모습으로 바람부는 행길에 나와 섰습니다. 아마도 K형께서는 나의 이 황량한 모습이 안타까워 위로와 격려가 깃들인 우정의 엽서를 보냈으리라 짐작됩니다.
K형, 아무튼 눈시울이 뜨거워질 만큼 고마웠습니다. 비록 학처럼 난처럼 살지는 못할지라도 무엇인가 뜻이며 보람이 있는 삶이 되도록 창조하는 자세로 살아가야하지 않겠습니까. K형, 어두운 밤입니다. 돌아가는 길목에 주막이 있으면 툇마루에 걸터앉아 별이 흐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농주 두어 주발 마실까 합니다. 정과 흥과 멋을 가득 부어 마시며 옛날 형이 늘 말씀하시던, “오동은 천 년을 늙어도 늘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평생을 가난해도 향기를 팔지 아니한다(桐千年老恒藏曲 梅平生寒不賣香)”를 혼자 되뇌어 보렵니다.
K형, 우리는 비록 멀리 떨어져 저 나름의 길을 살아갈지라도 이렇게 무언의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자랑이며 큰 위안인지 모르겠습니다. 첫눈이 내릴 무렵 또 편지 띄우리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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